[선진금융, 이정도는 돼야] 5. 투자은행 전성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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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우리의 주고객은 다국적 기업이나 외국 국가들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 업무는 비밀유지가 생명입니다. 입이 가벼운 회사로 비쳐지면 당장 영업이 어려워집니다. "

지난해 12월 11일 오전 뉴욕 브로드웨이 44번가 한 빌딩에선 작은 승강이가 벌어졌다.

모건스탠리딘위터의 기업금융 관계자들이 기자가 동행한다는 연락을 못받았다며 인터뷰를 사양하고 나선 것.

그러나 지난해 기업 인수.합병(M&A)부문에서 골드먼삭스를 제치고 1위로 올라선 것을 비롯, 투자은행 업무 전분야에서 '톱5' 안에 든 모건스탠리를 빼고는 투자은행을 거론할 수 없었다.

익명으로 쓰겠다며 설득해 겨우 시간을 얻어냈다.

"투자은행은 주식.채권이나 기업을 사고 팔아 이익을 얻기 때문에 거래하는 상품의 가격을 정확히 매기는 능력에서 우열이 갈립니다.

최근엔 복잡한 파생금융상품도 마구 쏟아져 나와 프라이싱의 중요성이 더 커졌죠. "

하버드 법대 출신 A씨의 설명이다.

모건스탠리가 미국 유수대학은 물론 미 항공우주국(NASA)에서까지 수백명의 수학자들을 스카우트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단다. 한마디로 투자은행업은 사람과 전산시스템이 장사밑천이란 설명이다.

미국 회계법인인 KPMG에 따르면 모건스탠리는 지난해 기록적인 수익을 올렸다. 순수익만 54억6천만달러.

지난해 6월말 현재 반기 순이익은 과거 모기업이었던 JP모건의 3배를 넘는다.

투자은행 전성시대를 얘기할 때 모건스탠리와 JP모건의 엇갈린 운명이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모건스탠리는 1933년 미국 정부가 '글래스 스티걸법' 을 제정한 직후 JP모건에서 떨어져 나왔다.

1920년대 대공황 당시 미국의 은행들이 예금으로 받은 돈을 주식.채권에 마구 투자했다가 망하자 이 법으로 예금.대출업무를 취급하는 상업은행은 투자은행업을 할 수 없도록 금지했던 것.

당시만 해도 JP모건은 미국 최대 상업은행이었다. 19세기말에는 중앙은행의 역할을 대신하기까지 했다. 모건스탠리가 JP모건의 자리를 넘본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면서 상황이 역전됐습니다. 신용도가 높은 미국의 대기업들이 자금조달 방법을 은행 대출에서 주식.채권 발행을 통하는 쪽으로 바꿔갔습니다. 이 와중에 미국의 초대형 은행들은 남미.아시아 등에 투자했다 치명타를 입었지요. " A씨와 함께 나온 B부장의 설명이다.

GE.마이크로소프트.코카콜라 등 미국의 내로라하는 기업들도 주된 자금조달처를 은행에서 증시로 바꿔버렸다.

이 때문에 예금.대출에 주력하던 상업은행들이나 위탁매매 수수료에 목을 매던 증권사들도 살아남기 위해 80년대부터 투자은행업에 앞다퉈 진출했다.

미국 최대 증권사인 메릴린치도 예외는 아니다. 월스트리트에 자리잡은 월드파이낸셜센터 12층. 멀리 자유의 여신상이 바라다 보이는 사무실에서 제임스 위긴스 수석국장은 "글로벌 투자은행으로의 변신이 우리의 가장 큰 화두" 라고 설명했다.

메릴린치도 70년대까지는 총수입의 53%를 주식거래 수수료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70년대 중반 미국 증권사들의 수수료 담합이 깨지면서 거래금액의 0.8%에 달하던 수수료가 0.2%로 떨어졌다. 그나마 온라인 증권사들이 저가 공세로 시장을 잠식해왔다.

78년 미국 10대 투자은행이었던 화이트월드를 전격 인수한 것을 시작으로 메릴린치도 투자은행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80년대엔 파생금융상품 업무를 집중적으로 키웠다. "연기금.뮤추얼 펀드의 대두 등 기관투자가 비중이 커지면서 대규모 자금의 효율적 운용이 쉽지 않게 된 것이 주요 원인" 이라는 설명이다.

이같은 노력의 결과 메릴린치는 최근 주식매매 수수료와 신용거래 이자 비중을 28.9% 수준으로 끌어내린 대신 상품.유가증권 매매수익(19.9%)과 투자은행 수익(16.5%).자산관리수수료(21.7%)가 균형을 이룬 안정적인 수익체계를 확립했다.

태평양 건너편 홍콩의 센트럴 금융가 원 익스체인지 스퀘어 빌딩 25층에서 만난 UBS워버그의 스티븐 선 아시아본부장은 유럽은행들도 투자은행업으로 최고 인력을 배치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투자은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금융기관의 3요소로 자본.사람.기술을 꼽는데 자본과 기술은 사람을 따라 옵니다. 따라서 최고의 인재를 끌어올 수있도록 보수나 회사의 분위기를 얼마나 잘 바꾸느냐에 투자은행의 성패가 달려 있습니다. "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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