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죽기로 결심하다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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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독살되었다는 설은 빠르게 번져나갔다. (……) 고종의 늦둥이 딸인 덕혜옹주는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도중 “총독부의 지령으로 어의 안상호가 전하를 독살했다. (……) 나도 언제 독살될지 몰라 마실 것은 늘 직접 만들어 보온병에 넣어 가지고 다니며 마신다”는 발언을 남겼다.

―『고종, 죽기로 결심하다』, 「프롤로그―1919년 1월 21일」 중에서

▲도판 2. 고종 일가. 왼쪽부터 영친왕, 순종, 고종, 순종비, 덕혜옹주(1915년경)

조선 26대 왕, 대한제국 초대 황제, 그리고 사실상 한국사상 최후의 군주였던 고종(高宗). 그의 삶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대원군과 명성황후 사이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맥없이 망국을 당한 평균 이하의 군주’ 정도였다. 그러나 요즘 들어서, 그저 무능한 왕으로만 그려졌던 고종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왕의 투쟁』, 『왕이 못 된 세자들』 등 주로 역사에 관련된 책을 쓴 저자 함규진의 『고종, 죽기로 결심하다』(자음과모음)는, 사실상 조선의 마지막 군주라고 할 수 있는 고종의 인간적 면모와 숨겨진 결단력을 재조명한다.

열두 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그늘에 눌려 지낸 끝에 겨우 홀로서기를 하자마자 격변의 시대에 휩쓸려버린 고종은 사방에 적들이 가득한 상황에서 일신의 보전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 꼭 겁이 많아서라기보다, 먼저 자신이 버티고 있어야 나라가 무너지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끝끝내 망해버린 오백 년 종묘사직과 ‘이태왕(李太王)’이라는 우스꽝스러운 명칭을 받아 든 고종은 이미 모든 게 늦었다는 자책 속에서 번민하던 끝에, 죽음을 각오하고 최후의 반격을 준비한다.

▲도판 28. 서울 청량리를 지나가는 고종의 장례 행렬(1919)

저자의 말처럼 ‘평범한 사람도 편안히 살기 힘든 격변의 시대에 한 나라의 군주로서 고종이 얼마나 힘든 처지에 놓여 있었는가’에 대한 생각으로 쓰인 이 책은, 고종의 일대기를 그의 인간적인 고뇌와 결단에 중점을 두고 펼쳐간다. 특히 정치적 동반자로서 명성황후를 바라보는 시선, 일제와 열강의 침략 속에서 이완용과의 관계를 흥미롭게 그릴 뿐만 아니라, 여태껏 잘 알려지지 않았던, 부국강병이나 광복운동에의 의지, 결단을 읽을 수 있다.

또한 학교에서 그저 딱딱하게만 배웠던 역사교과서 속 내용, 일제에 의해 왜곡된 역사적 사실 등을 결코 지루하지 않고 흥미롭게 재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일국의 군주로서 난국을 타개하려던 시도만을 들어 무능한 왕이라는 이전의 평가를 무작정 쇄신하려 하지는 않는다. 당시의 역사적 배경에 관한 객관적인 서술과 대외적인 비교를 통해, 마지막 판단은 책을 읽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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