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새해가 아름다운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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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새해는 아름답다. 빛바랜 묵은 달력을 벽에서 떼어내고 새 달력으로 치장해서가 아니다.

구조조정을 앞두고 근심과 걱정으로 새해를 맞은 이들이 적지 않고, 오로지 강한 자만이 살아 남는 '정글의 사회' 가 개선될 조짐은 여전히 보이지 않긴 하지만 그래도 새해엔 우리 사회를 아름답게 가꿔나갈 씨앗들이 뿌려지는 것을 볼 수 있는 때인 까닭이다.

*** 좋은 인연으로 여는 새해

그 하나. 지난 연말 지인으로부터 연하장을 하나 받았다. 붓으로 또박또박 쓴 뒤 낙관까지 꾹 누른 연하장에는 '참 좋은 인연입니다. 행복이 가득한 한 해가 되소서' 라고 적혀 있었다.

시(詩).서(書).화(畵)의 세 재주를 함께 지닌 옥전(玉田) 진말숙(陳末淑)씨가 보내준 것이다.

컴맹을 면한 정도라면 e-메일 카드로 새해 인사를 주고 받는 것이 예삿일이 돼 버린 이즈음 붓 끝이 스치고 간 흔적이 남아 있는 먹 자국을 보는 것도 참으로 정겨웠지만 그것보다 더욱 가슴에 와 닿았던 것은 '참 좋은 인연' 이라는 구절이었다.

옥전을 안 것은 지난 해 봄 무렵이니 알고 지낸 시간이란 나이테를 한 겹 두를 정도도 못된다. 그 짧은 기간의 만남을 '참 좋은 인연' 으로 풀어낸 속뜻이 더욱 살갑다.

세월과 함께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때론 나의 필요 때문에, 때론 상대방의 요청으로 이런저런 인연을 맺어간다. 살아가는 일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인간관계' 라고 한다.

죽마고우(竹馬故友)가 하루 아침에 적(敵)이 되기도 하고 믿었던 이가 뒤통수를 후려치는 일도 비일비재한 것이 우리네 인간사다.

이런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 '참 좋은 인연' 으로 여는 새해란 아름다울 수밖에.

그 둘.

한 모임에서 만난 주부가 들려준 그 가정의 새해맞이는 참으로 신선했다.

그는 "새해엔 늘 온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각기 자신의 새해 설계를 말하고 이를 글로 적어 상자에 담아 둔다" 고 말했다.

이름하여 '약속상자' 다. 각자의 약속을 담아 둔다는 사실도 예사롭지 않았지만 더욱 놀라웠던 것은 그 다음이었다.

그 해 내내 약속상자의 뚜껑을 닫아 두었다가 마지막 날 가족들이 다시 한자리에 모여 약속상자를 열고 각자 자신이 써 넣은 쪽지를 꺼내 한해 동안 이를 얼마나 지켰는지 되돌아본다는 것이다.

처음엔 제가 한 약속일망정 한해 내내 기억하기도 어려웠을지 모른다.

그러나 해를 거듭할수록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반추하는 일에 익숙해져 어느덧 새해 구상은 훌륭하게 마무리지어졌을 것이고, 그럼으로 해서 새해란 새로운 도전과 기회의 시간이 됐을 터이니 아름다울 수밖에.

그 셋.

한 전자지불 서비스업체는 서울 강남의 테헤란로 주변을 청소하는 일로 새해업무를 시작했다고 뉴스는 전한다.

청소 후엔 새해 목표와 각오를 담은 구호를 제창하고 지난해 야근을 하면서 즐겨 먹었던 자장면.짬뽕.피자 등을 거리에서 점심식사로 먹으며 올 한해도 테헤란로를 밝히며 열심히 일할 것을 다짐했다는 것이다.

깨끗하고 솔선 수범하는 벤처기업이 되겠다는 이미지를 홍보하기 위한 것이라곤 하지만 하고 많은 것 가운데 거리 청소를 택했다는 사실이 눈길을 끌었다.

*** 희망의 씨앗 찾는 계기로

전날 밤 눈까지 내려 한층 지저분해진 거리를 빗자루로 쓸어내며 그들은 신나게 거리 청소를 했을 것이다.

빗자루가 스치고 지나칠 때마다 말끔하게 드러나는 보도블록이며 아스팔트도 그렇지만 가끔 건네지는 감사의 눈길 속에서 작은 행복을 맛보았을 것이다.

함께 행복을 나누는 새해처럼 아름다운 것이 또 있을까.

서로 '참 좋은 인연' 이라고 말할 수 있는 관계란 신뢰를 심는 씨앗이 된다.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하며, 실천여부를 점검해보는 일은 책임있는 시민을 길러내는 씨앗이다.

'내 일, 네 일' 을 따지지 않고 '우리 일' 로 여겨 남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앞장서 하는 것은 봉사의 씨앗이다.

어둠이 진할수록 불빛은 더욱 강렬하다. 어렵고 힘들수록 희망찾기에 매진한다면 가난해도 살기 좋은 사회가 될 수 있다.

홍은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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