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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세상의 모든 것을 거꾸로 봤더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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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보탑을 줍다
유안진 지음, 창비, 132쪽, 6000원

시인 유안진(63·사진)씨의 열두번째 시집 『다보탑을 줍다』는 마침 시인의 등단 40년을 기념하는 시집이다. 유씨는 “박목월 선생님으로부터 1년에 한차례씩 추천받는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 1965년 등단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유씨는 “기쁘지 않고 오히려 쓸쓸한 기분이다. 다음 시집에서는 어떤 시를(독자들에게) 보여줄지 벌써 부담스럽다. 그런 때문인지 요즘 잠도 설칠 정도”라고 말했다.

화제는 자연스럽게 시쓰기의 걱정과 부담에서 유씨의 시 공부로 넘어갔다.

유씨는 “2000년 『봄비 한 주머니』를 펴낸 뒤 내 시에 대해 누적된 불만이 봇물처럼 터졌다”고 밝혔다. 노자의 ‘도덕경’은 한자 5000자 안팎에 불과한 작은 책이지만 누대를 살아남는데, 자신은 남는 책을 쓰기는커녕 애꿎은 나무만 베게 한 게 아닌가 하는 자책이 들었다는 것이다. 너무 모험을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한번이라도 시에 전력투구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매주 수요일 시 공부 모임과 격주로 열리는 한시(漢詩) 공부 모임은 그런 유씨에게 맞춤한 것이었다. 등단을 준비하는 모임이어서 젊은층이 주축인 수요 모임의 구성원들은 처음에는 기성 시인의 ‘접근’에 거부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유씨는 밥 사고 술 사는 물량 공세로 벽을 허물었고 이제는 ‘두려운 후배’들과 허물없이 시를 놓고 토론하는 사이가 됐다.

유씨는 “수요일에 발표할 시를 쓰기 위해 주말은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골방에 틀어박히고, 발표 후에는 젊은이들의 의견을 적극 받아들여 시를 고치기도 하고 버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지난번 열한번째 시집과 이번 시집 사이에는 유씨의 그런 힘겹고 용기 어린 노력이 가로놓여 있다. 유씨는 “수요 모임에 참가한 지 3년째”라고 밝혔다. 또 “수요 모임 이전에 써두었던 것들은 대부분 이번 시집에서 제외했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문장부호·숫자 등 의사소통에 소용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과감하게 사용했고, 사물과 현상을 거꾸로 보려고 노력한 점 등이 달라졌다”고 꼽았다.

“A4 용지에다/아라비아 숫자 3을 거푸 쓰니/백지는 그만 하늘이 되어/새 한쌍이 날아가고 있다/앞서 날고 뒤를 따르는 저 삼삼한 사이가/성급하고 조급해 보여 아무래도 미심쩍다”(‘33’ 중) ‘33’은 말하자면 숫자가 도상학적으로 사용된 경우다.

“고개 떨구고 걷다가 다보탑(多寶塔)을 주웠다/국보 20호를 줍는 횡재를 했다/석존(釋尊)이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땅속에서 솟아나 찬탄했다는 다보탑을//두 발 닿은 여기가 영취산 어디인가/어깨 치고 지나간 행인 중에 석존이 계셨는가/고개를 떨구면 세상은 아무데나 불국정토 되는가//정신차려 다시 보면 빼알간 구리동전/꺾어진 목고개로 주저앉고 싶은 때는/쓸모 있는 듯 별 쓸모없는 10원짜리/그렇게 살아왔다는가 그렇게 살아가라는가.”(‘다보탑을 줍다’ 전문)

표제시 ‘다보탑을 줍다’는 유씨의 고심에 대한 보상이기라도 하듯 군더더기가 없다. 시집에는 고심 어린 유씨의 시 70여편이 실려 있다.

글 = 신준봉 기자, 사진 = 오종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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