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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사막 남극을 찾아서](23) 세종기지에서 맞은 설

중앙일보

입력

박지환 자유기고가 jihwan_p@yahoo.co.kr

*박지환씨는 헤럴드경제, 이데일리 등에서 기자를 했었으며, 인터넷 과학신문 사이언스타임즈에 ‘박지환 기자의 과학 뉴스 따라잡기’를 연재했었다. 지난 2007년에는 북극을 다녀와 '북극곰도 모르는 북극 이야기'를 출간했다. 조인스닷컴은 2010년 2월까지 박씨의 남극일기를 연재한다.

세종기지에서도 민족 최대 명절인 설은 역시 설이다. 한국에서만큼은 아니지만 대원 모두가 설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설 연휴가 시작되기 며칠 전부터 대원들은 막걸리를 빚었다. 설 전날에는 두부, 만두, 부침개 등을 만들었다. 음식을 만드는 일에는 대원들의 손재주가 유감없이 발휘됐다. 대원들은 세종기지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일에만 손재주가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어지간한 솜씨의 가정주부는 울고 갈 정도로 음식솜씨가 좋았다.

한국에서 가져온 누룩을 밥에 섞은 뒤 제대로 발효될 수 있도록따뜻한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발전동 한 켠에서 보관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소주와 맥주 등도 있다. 하지만 조상에 대한 정성을 들이고 대원들끼리 잔 재미 삼아 차례에 쓸 술을 직접 빚은 것이다.

음식 만드는데 손재주가 있는 대원은 고기와 야채, 김치를 다지고 물기를 짜내 만두를 빚었다. 하지만 각자 빚는 만두의 모양이 달라서 어느 대원이 만든 만두인지 알 수 있었다. 대원들이 빚은 만두는 한국에서 가져온 떡살과 함께 떡국을 끓였다.

설 음식 준비가 모두 끝나고서는 설 전날 밤에는 세종기지에 들어온 모든 대원들이 휴게실에 모여 윷판를 벌였다. 월동대원들은 맡은 임무에 따라 총무반, 연구반, 유지반으로 각각 팀을 만들었다. 여름철 연구를 위해 기지에 들어온 하계대원들도 팀을 꾸렸다. 상금이 걸려있는지라 모두들 신경전을 벌였다. 또 높은 말을 만들기 위한 기합 넣는 소리와 나오는 말에 따라 환호성, 아쉬운 탄성으로 기지에 활력이 넘쳤다. 윷판은 유지반의 승리로 끝났다.

설날 아침 8시에는 한국이 있는 북쪽을 향해 차롓상을 차리고 대원들 모두가 번갈아 가며 절을 올렸다. 일부 대원들은 고국의 가족들이 생각나는지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도 했다. 조용한 분위기도 잠깐이었다. 나이 어린 대원들이 기지대장을 비롯해 나이 많은 대원들에게 세배를 하겠다며 뒤따라 다니는 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기지에서는 대장이 아버지이고 총무가 어머니이다. 나이 많은 대원은 큰 아버지이고 작은아버지이다. 어린 대원은 막내동생이자 아들이다. 세종기지에 머무르는 대원 가운데 나이가 가장 많은 대원은 50대 중반이다. 대학을 갓 졸업한 막내 대원과 나이 차이가 30살 이상이다.

차례를 지낸 뒤에는 기지 운영에 필요한 최소 인원을 제외한 월동대원들은 중국기지를 방문했다. 며칠 전 세종기지를 방문한 중국기지 대장은 세종기지 대원을 초청했다. 세종기지의 유일한 여성대원인 전미사 대원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중국기지를 방문했다. 남성 대원들은 모두 그녀의 꼼꼼함에 놀랐다. 평소 씩씩하기가 남성대원 뺨치는 여성대원었다.

한복을 입고 보트를 타는 모습은 무척이나 불편해 보였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한복을 입고 다른 기지를 방문한다는 것이 설렌단다. 이억만리 타향 ‘남극세종기지’에서 한복 입은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기지에 남은 하계대원들과 월동대원들은 휴게실에 모여 담소를 나누거나 당구를 치며 시간을 보냈다. 막히는 고속도로에서 갇혀 있지 않아 좋다고는 하지만 대원들 모두가 고국의 가족을 그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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