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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바이러스와 반세기 (53)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53. 비상 걸린 WHO

일본 국립보건원장을 지낸 오야박사를 포함한 일본인 교수 12명이 우메나이교수의 선창에 따라 일제히 일어서서 '이호왕 만세' 를 외친 것이다.

그들이라고 자존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실리를 위해 명분을 기꺼이 희생하는 일본인 특유의 자세는 배울 만한 것이었다.

그해 나는 일본 문부성으로부터 정식초청을 받았다. 일본인 교수들에게 유행성출혈열에 대한 지식을 아낌없이 전수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빈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하게 됐다.

일등석 비행기표에다 공항에선 일본 외무성과 문부성의 관리들의 영접까지 받았다. 숙소도 도쿄 최고의 뉴오타니 호텔이었다.

일본의 병원과 대학을 다니며 강연을 마친 나는 도쿄주재 한국대사관 만찬에 참석하게 됐다.

그런데 이곳에서 나는 엉뚱한 경험을 해야 했다. 당시 한국대사관엔 교육부에서 파견된 국장급 고위공무원이 있었는데 그가 나에게 왜 하필 질병 이름을 한국형출혈열이라고 명명했느냐" 는 것이 아닌가.

이유인즉 안 그래도 일본에서 한국인의 위상이 떨어져있는데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괴질의 이름에까지 '한국' 이란 국호를 삽입한 것은 난센스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한국의 대외 이미지를 떨어뜨린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질병의 이름은 첫 발견자 등 해당 질병의 분야에서 가장 업적이 뛰어난 학자만이 붙일 수 있다.

그리고 첫 발견자는 대개 자신의 나라를 상징할 수 있는 이름을 붙인다. 그것은 그 나라의 과학자가 그 질환에 대해 가장 공로가 많았음을 대대손손 알릴 수 있는 애국심의 발로인 것이다.

예컨대 비록 세균전의 전범이지만 일본의 가사하라박사가 일본뇌염 바이러스를 발견한 뒤 질병의 이름이 일본뇌염(Japanese encephalitis)이 됐다.

뇌염은 유행성출혈열보다 훨씬 치명적인 질환이다. 그러나 일본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해서 아무도 일본을 흉보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일본뇌염에 대해 일본인의 공적을 기릴 뿐이다.

80년 일본의 대학연구실과 서울의 집쥐에서 바이러스가 발견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세계보건기구(WHO)에서 공문이 내려왔다.

야생들쥐인 등줄쥐라면 몰라도 집쥐와 실험실 쥐에서 바이러스가 나타났다면 보건학적으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세계보건기구는 나에게 인천과 부산의 집쥐에 대해 조사해달라며 연구비를 보내왔다. 하필 하고 많은 도시 중 인천과 부산일까. 영리한 독자라면 곧 눈치채겠지만 이곳은 한국의 대표적인 항구도시다.

한국에서 감염된 집쥐들이 이곳을 통해 외국으로 확산됐을 가능성이 있는지 살펴보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는 김수암씨 등 실험실 직원들을 동원해 인천과 부산의 집쥐들을 잡아 조사해봤다.

그랬더니 부산에선 집쥐의 12%, 인천은 무려 80%가 서울바이러스에 감염돼있는 것이 아닌가. 특히 인천 부둣가 횟집 근처에서 잡은 쥐들은 대부분 혈청검사에서 양성반응을 보였다.

이렇게 되자 미국 등 선진국 방역당국에서 나의 조사결과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미육군전염병연구소에선 직접 연구관이 파견되기도 했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세계 각국의 항구를 오가는 배는 쥐의 소굴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해군에선 군함에서 쥐를 잡아오는 사병에게 군의관이 쥐꼬리를 세어가며 많이 잡은 사람에게 휴가를 보내주는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배엔 영락없이 사람이 먹을 쌀 등 식량이 있게 마련인데다가 쥐는 매우 헤엄을 잘 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쥐가 없는 배는 없다. 그래서인지 뱃사람들에겐 '쥐가 없는 배는 타지 말라' 는 속설이 있을 정도다.

이호왕 <학술원 회장>

정리〓홍혜걸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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