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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연극‘에이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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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맙소사! 관객은 이미 아는거죠. 저 배우가 커다란 헛간 안에선 줄창 떠들어댈 거라는 걸. 왜 인정하지 않는 거죠? 연극의 유효 기간은 지나가 버렸다구요.”

믿을 수 있겠는가. 무대에서 이토록 노골적으로 연극을 비난하다니. 방송국 PD인 사위 도미닉(김영민 분)은 연극 배우인 장모를 향해 독설을 내뱉는다. “연극이 누구에게 말을 하고 있죠? 그저 자위행위나 하고 있는 겁니다.”

연극 ‘에이미’(연출 최용훈·사진)는 건조한 자아비판이다. 한번쯤 쇠락해가는 연극에 대해 자기 연민도 있으련만,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칼날은 매섭다. 하지만 상대는 노련한 장모 에스메(윤소정 분) 아니던가. 그는 이럴때 맞대응이, 스스로 무덤을 파는 일이라는 것쯤은 익히 알고 있다. 그저 냉소할 뿐이다. “재미있지 않아? 언제나 항상 ‘연극의 죽음’이야. 뭐든 지들이 꼴리는 것의 죽음이래. TV의 죽음, 왜 이런 것들은 안 다루지.”

예상외의 반격에 사위는 흠칫 놀란다. 전열을 정비해 전선을 옮겨간다. “우린 대중들에게 얘기하죠, 압도되지 말라고. 그냥 자신의 본능을 믿으라고. 오직 예술만이 고상하고 우월한 것처럼 포장하지 마세요.” 이때 장모가 카운터 펀치를 날린다. “이 나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문화 프로그램의 사회자에겐 단 하나의 결격 사항이 있지. 바로 예술을 혐오한다는 것!”

무림의 고수를 보는 듯한 이들의 대결은 흥미진진하다. 아킬레스건을 콕콕 건드리면서도, 대사는 변죽이 아닌 본질을 여지없이 파고든다.

곧이은 모녀의 대화는 반전이다. 신·구 세대의 갈등이란 식상한 용어로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어머니는 지금껏 자기가 살아온 삶이 부정될까 두려워 떨며, 딸(서은경 분)은 어머니의 가치관을 인정할 수 없어 몸부림을 친다. 그 끝이 얼마나 깊은 상처로 남을 것인지 둘은 짐작하지 못한채 철로를 내달린다.

마지막, 사위는 다시 장모를 찾아간다. 어설픈 화해? 그런 건 없다. 그저 깊은 눈으로 서로를 바라볼 뿐이다. 돈다발이 가득 든 상자를 앞에 두고 장모는 말한다. “내 인생은 여기 극장에 있어. 막이 오르면 내 인생이 펼쳐지지. 내 공연이 내 삶이야.” 그건 진심일까, 또 다른 자기 최면일까. 연극에 대한 끝없는 부정을 통해 연극의 가치를 새삼 곱씹게 해주는 수작이다.

▶21일까지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02-3673-5580

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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