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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조심 사설도청] 上. 실태와 피해사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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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서울 삼성역 네거리, 역삼역.선릉역 반경 50여m 지점, 양재역 네거리, 여의도 증권거래소 주변, 그리고 대전 대덕단지 모 기업 연구소 인근…' .

본사 취재팀이 지난 보름간 도청 전파를 잡아낸 장소들이다. 벤처기업.금융기관들이 밀집된 지역에선 어김없이 도청 전파가 새나왔다.

아침에는 없다가 오후만 되면 잡히는 경우도 있었고, 24시간 쉴새 없이 전파가 흘러나오는 곳도 있었다.

도청기도 교묘한 장소에 숨어 있었다. 책상서랍 안쪽 깊숙이에, 전기 콘센트 안쪽에, 전자계산기 속에 감춰져 있었다. "도청기는 형체를 자유자재로 바꾸는 물과 같다" 는 도청탐지업체 관계자의 말대로였다.

◇ 검색= "찌지직…탁, ○○주식, 채권을 매입합시다." 지난 8일 오후 3시 테헤란로. 취재팀 차량 안의 도청 수신기 4개가 동시에 작동하기 시작했다.

보안업체로부터 빌린 휴대용 도청 전용수신기, 무전기형 광대역 수신기, 차량용 전용 수신기, 컴퓨터를 개조한 광대역 수신기다. 도청 전용의 3백98.60㎒대 주파수였다.

약 10여분간 벤처기업 회의로 추정되는 내용이 그대로 생중계됐다. 말하는 사람의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감도(感度)가 좋았다.

취재팀이 거쳐간 테헤란.홍릉 밸리, 여의도, 마포, 대전 대덕 밸리도 사정은 비슷했다. 그 중엔 도청기는 설치됐지만 사람이 자리를 비워 '윙-' 소리만 발산되는 경우도 많았다.

취재팀은 도청기를 찾아내는 작업도 병행했다. 기업체 회의실.임원실 등이 역시 주된 표적이었으나 개인 승용차 속에서 도청기가 나온 사례도 있었다.

이달초 한 벤처기업 임원의 승용차 안에서 발견된 도청기는 카 오디오 밑부분의 빈공간 구석에 깊숙이 감춰져 있었다.

지난 14일 안테나 검색으로 찾아간 역삼역 주변의 한 벤처기업. 취재팀이 "도청기가 있을 가능성이 90%가 넘는다" 며 확인검색을 요청해 보았으나 거절당했다. 회사측은 "도청기가 나오면 직원들간에 불화가 심해진다" 는 이유를 댔다.

◇ 속출하는 도청 피해=컴퓨터 하드웨어 전문업체인 벤처기업 A사. 얼마 전 비공개 회의 내용이 새는 바람에 외국업체와의 전략적 제휴 계획이 완전히 헝클어졌다.

도청검색 결과 회의실 책상 위에 놓인 인주(印朱)속에서 초소형 일제 도청기가 발견됐다. 몇몇 간부들만 참여하는 전략회의 내용이 '실(實)시간' 으로 누군가에게 흘러가고 있었던 셈이다.

전자분야에 관한 선도기술을 가진 벤처기업 B사. 기술 개발은 먼저 했지만 꼭 한발씩 경쟁업체에 밀렸다.

한숨만 내쉬던 이 회사는 이달 초 도청검색을 의뢰했고, 연구개발실장 책상에서 도청기를 찾아냈다.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벤처기업 C사도 몇몇 간부만 모여 토의된 내부 비밀이 어김없이 새나가 사원간 반목이 심해지자 지난달 중순 도청검색을 부탁했다. 결국 건물 단자함 전화 선로에서 도청기가 발견됐다.

에스원 조성룡 팀장은 "정기적 관리 대상인 대기업.벤처기업 1백여곳 중 20여곳에서 도청기가 발견됐다" 고 말했다.

◇ 퇴출.부실 기업은 도청 온상?=구조조정 대상 기업에 도청이 집중되는 원인은 인사 정보를 미리 빼내고, 퇴직에 대비해 내부 기밀을 손에 넣어두려는 직원들의 '도덕적 해이' 때문이다.

실제 도청검색 업체들은 "대개 1백군데 검색하면 7~8곳에서 도청기가 나오지만 부실기업의 경우 10군데 중 3~4곳 정도로 발견된다" 고 말한다.

이와 관련해 퇴출업체들을 전문적으로 관리해 온 보안업체 007월드의 한 관계자는 특히 임원실.회의실에서는 거의 어김없이 나온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얼마 전 한 건설회사에선 도청하는 측에서 전화를 걸면 임원실 전화기가 도청기로 변해 일정시간 동안 주위의 음성을 도청할 수 있는 장치도 발견됐다.

세운상가에서 만난 도청기 판매업자 金모(45)씨는 "살생부 소문이 돌면 회사 임원이라며 1천만~2천만원어치씩 무더기로 도청기를 사간다" 며 "이에 따른 가격 인플레 현상도 빚어지고 있다" 고 말했다.

◇ 도청기 없이도 엿듣는다=지난 6일 양재역 네거리에서 포착된 3개의 도청전파. 주파수대가 일반 도청전파(3백90~4백20㎒)보다 높은 8백㎒대였다.

보안업체에 문의한 결과 무선 마이크에서 흘러나오는 전파였다. 스파이죤 이원업 부장은 "기업들이 무선마이크를 사용해 회의를 할 경우 전용수신기만 있으면 옆 다방에 앉아 대화를 훔쳐 들을 수 있다" 고 말했다.

실제로 한 공기업 본사의 경우 회의 기밀정보가 새나가자 최근 은밀한 자체 조사를 벌였다. 결국 이런 방법으로 정보가 누출된 것으로 결론짓고 '회의 적색경보' 를 발령한 상태다.

기획취재팀=이상복.서승욱.조민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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