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고 소진섭 전 대검찰청 차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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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지난 13일 고향인 전북 익산군 연동리의 양지바른 산기슭에 묻힌 소진섭(蘇鎭燮)전 대검 차장검사. 90세를 일기로 타계할 때까지 평생 정의를 신봉하며 어떠한 공작이나 외압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그의 발자취는 검찰의 사표(師表)가 될 만하다는 평이다.

특히 4.19를 촉발시킨 마산데모 때 고인은 그 소용돌이의 복판에서 이렇게 처신했다. 고인이 남긴 유필 메모와 언론보도, 관계자 증언등을 통해 재구성한 급박했던 당시 상황.

#1.1960년 3월 30일

집권 자유당과 경찰은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며 궐기한 제1차 마산데모를 무자비하게 진압한 뒤 '오열(五列.간첩)' 의 배후조종으로 몰고 갔다. 김주열군이 마산 앞바다에서 시체로 떠오른 것도 이때다.

그러나 당시 대검 차장으로 수사를 지휘하던 蘇차장검사는 "사건 배후가 공산당이란 확증은 하나도 없다" 고 잘라 말한 뒤 되레 "뺨을 한대 때린 경관도 고문경관으로 의법 처단할 것" 이라는 입장을 천명했다. 그의 발언은 언론에 대서특필되며 큰 파문을 일으켰다.

#2.그해 4월 13일

다시 경찰의 은폐조작에 항의하는 대규모 2차 마산데모가 일어나자 당시 조인구(趙寅九)치안국장은 기자들에게 "데모에 참가한 군중들은 폭도" 라며 "참가자는 앞으로 소요죄를 적용해 엄단하겠다" 고 말했다.

그러자 蘇차장검사는 이를 "趙국장의 개인 의견에 불과하다" 고 일축했다. 그의 이같은 발언은 결국 이승만 대통령의 분노를 샀다.

정부는 즉각 내무.법무.국방장관 명의의 공동담화문을 발표한 뒤 '대공3부 합동수사반' 을 만들어 수사권을 검찰로부터 빼앗았다.

고인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음날인 14일 "현지 검찰은 모든 사건보다 고문경관을 엄중 수사하라" 고 명령했다.

그러나 현지에 내려간 합수반은 15일 "2차 마산사건에서 '제 오열의 사주' 를 포착했다" 고 발표한다.

때맞춰 李대통령도 담화문을 통해 "철없는 난동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의법처리하라" 고 지시했다.

부정선거와 과잉진압을 감추기 위해 무리수를 둔 결과는 끝내 4.18 고대 앞 시위사건과 4.19의거로 이어졌고, 李정권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3.4.19 이후 허정(許政) 과도정부하의 6월 20일

부산지검 특별수사반은 마산데모 당시 합수반의 파견 목적에 대한 추적에 들어가 진실을 밝혀냈다.

제1차 마산사건 때 '오열 조작' 공작이 실패로 돌아가자 마산의 시위군중 속에 별동대를 침투시켜 용공구호를 외치게 하고, 별동대로 하여금 반체제 언론인과 검사들을 살해케 한다는 계획이었다는 것이 당시의 수사결과다.

그때 처단 리스트 1호에 올랐던 사람이 바로 蘇차장검사였다고 검찰은 발표했다. 그래서 가족들은 "만약 4.19가 일주일만 늦었어도 생명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 이라고 지금도 가슴을 쓸고 있다.

李정권이 몰락하자 모든 언론은 "차기 검찰총장으로 소진섭 대검 차장이 내정됐다" 고 보도했다. 하지만 그는 검사로서 최고 영광의 자리를 마다했다. "이유야 어떻든 李정권의 녹을 먹었다" 는 게 고사이유다.

이처럼 그는 권력 앞에 당당했고 자리에 연연하지 않은 대쪽같은 검사였다. 그는 일제시대 말기 연희전문학교 영문과를 다니다 중퇴한 뒤 37년 경성법학전문학교를 나와 38년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해 법조인이 됐다.

"첫 부임지인 청진지법 검사국에서 일본인 경찰서장을 구속시켰고, 자유당 시절 부산지검에 근무할 때는 최고 실세 이기붕(李起鵬)의 도장이 찍힌 명함을 지니고 민원을 하러 온 유지를 내쫓을 정도였다" 고 한 측근은 전했다. 61년 변호사 개업 뒤에도 검찰에 있을 때 쌓은 명예를 돈 때문에 더럽히는 일이 없었다.

"사건 의뢰가 오면 무조건 맡아야 하는데 '나쁜 놈이다, 아니다' 하면서 먼저 '재판' 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 돈을 벌래야 벌 수가 없지…. "

그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한 동생 진우(鎭宇.67)씨의 회고다.

대검차장 출신의 변호사로 30년간 활동했지만 유산은 서울 안암동의 집 한 채뿐이라고 진우씨는 말했다.

'인간 소진섭' 은 또한 따뜻한 휴머니스트이자 풍부한 감성을 지닌 로맨티스트였다.

그는 51년 부산지검장 재직할 때 전쟁고아와 거지들을 돌봐주기 위해 '대한갱생원' 이란 사설 자립시설을 만들기도 했다.

변호사로 일하면서 고인은 '난(蘭)' 을 비롯, '달은 동쪽으로 간다' '다시 흐르는 강' 등 6권의 시집을 냈다. 그의 대표시 '그만큼' 에는 90 평생을 일관한 고인의 겸허한 삶의 자세가 담겨 있다.

"그 이상의 것도/이하의 것도/그만큼이 될 수는 없다/그렇기 때문에 나는/나의 삶 그만큼의/하루하루에 충실하고/똑바로 내 자리를 지키면서/그 가치에 대한/알맞은 값이 치러지는 쪽에서/늘 살고 싶을 뿐이다. /풀잎 끝에서 떨어지는/한 알의 이슬 방울이/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그 크기만큼의/대지를 절(적)시우듯이. "

강민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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