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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돼지띠라 막일 하며 살아가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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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스타 스님인 현각은 용띠라서 하늘을 펄펄 날아요. 재주도 많고요. 저요? 돼지띠라서 노가다(막일)로 살아요. 미 서부 캘리포니아 모하비 사막에 한국식 절인 태고사를 10년째 짓는 것도 그래서인가 보지요?"

인터뷰 중 '만행'의 저자로 유명한 현각 스님 얘길 꺼냈더니 무량(45.사진) 스님은 뜻밖의 유머로 화답해왔다. 물론 우리말 대답이다. 내친김에 스님이 펴낸 수행기 '왜 사는가'(상.하권, 열림원)에는 한국 속담과 사자성어가 적절히 인용돼 있어 술술 읽히더라고 털어놓았다. 그는 대뜸 쩔쩔매는 시늉부터 했다. "아이쿠, 저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니까요."

'왜 사는가'출간에 맞춰 서울에 온 무량은 현각과 함께 해외포교의 으뜸인 숭산 큰스님의 제자. 23세에 출가했으니 현각보다는 수계(受戒)가 10년 빠르다. 그런 무량은 숭산 슬하의 알토란 같은 20명 미국인 출가 제자들인 무상(로스앤젤레스 달마선원), 무심(계룡산 국제선원), 대봉(화계사) 스님과 함께 한국불교를 공부하는 수행자들. 무량은 "미국에는 숭산 스님을 따르는 영향력 있는 재가신자만 1000명이 넘는다"고 귀띔해줬다.

'왜 사는가'에 따르면 무량(속명 에릭 버렐)은 변호사 아버지를 둔 백인 중산층. 하지만 큰 의문을 품은 그에게 대학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예일대 슬로건은 '빛과 진리'였지만 죽은 지식에 불과했다."(상권 74쪽)는 것이다. 살아있는 지혜를 찾아 그는 '예언자'의 칼릴 지브란, 실존철학, 요가를 거쳐 드디어 출가를 결심한다. 이런 고백을 담은 상권은 68혁명 뒤 서구인들의 자기문명에 대한 염증을 반영하는 듯 보인다.

하권은 태고사를 짓는 노동수행의 일과와 이곳이 "온누리 평화를 가져올 마당"이 될 것을 기원하는 마음이 펼쳐진다. 한국문화에 대한 따듯한 애정은 절절하다. 화장지 없이 물과 손으로 뒷일을 해결하는 서울 서초동 정토법당의 환경친화형 화장실을 태고사에 도입하려는 노력 등도 섬세하다. 무량이야말로 토종 한국인이 아닐까 싶다. 특히 정서부터 그렇다.

"중국과 일본의 절은 나와 맞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의 절은 달랐다. 건축도 미술도 인간중심적이었고, 감흥부터 밀려왔다."(하권 178쪽)

그런 무량은 인터뷰에서 "일본불교는 19세기 말에 미국에 상륙했다. 티베트불교와 위빠사나 수행도 꽤 일찍 자리를 잡았으니 한국불교는 늦은 편"이라고 말했다. 반면 한국불교는 수행전통이 펄펄 살아있다는 것이다. 책의 이런 대목은 지구촌의 대안종교로 각광받는 불교의 앞날에 대한 평가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면 각국 불교들이 미국 실정에 맞게 정착해서 '미국 선불교'라는 새로운 종파를 탄생시키게 될지도 모른다. 100년 뒤 불교가 더욱 대중화된 미국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하권 182쪽)

한편 일요일마다 로스앤젤레스 근방 불자들 예배의 요람으로 등장한 태고사는 요사채와 대웅전이 이미 지어졌고, 선방.암자.일주문 등을 과제로 남겨 놓은 상태다.

조우석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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