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진리 쉽게 설명하는 학승이자 선승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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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호 31면

컵에 들어 있는 같은 분량의 물을 보고 어떤 사람은 “반이 찼다”고 하고 다른 사람은 “반이 비었다”고 한다. 불교의 인연과 그리스도교의 섭리가 “결국 같다”는 사람이 있고 “전혀 다르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섭리 때문인지 인연 때문인지 기자는 10일 송광사로 갔다. 송광사라는 큰 절이 있다는 말을 듣고 왠지 그 이름이 마음에 박힌 지 40년 만이었다. 송광사에서 현봉 스님이라는 큰스님을 만났다.

내가 본 현봉 스님

스님이 학승이자 선승이라는 것을 들었기에 처음 뵈었을 때 “요즘은 어떤 책을 쓰시거나 구상하고 계십니까”라고 묻자 스님은 “내가 무슨 책은, 대단한 게 아니고 해석을 좀 달기는 했으나 아주 기초적인 겁니다”라고 했다.인터뷰가 끝났을 때 스님이 말씀했다. “부처 이야기는 하기 싫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스님은 극구 인터뷰를 사양했으나 여러 명이 나서서 설득해 인터뷰를 성사시켰다. 스님은 “여기까지 오셨는데 속인 게 아닌지… 좋은 불교 학자도 많은데… 내놓을 게 아무것도 없는데 차나 한 잔 마시며 이야기하려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 어떤 이야기를 하시려고 했습니까?”라고 묻자, 최근에 한 여행 이야기를 하셨다.홀로 배낭 여행을 가셨다. ‘계급장’ 떼놓고 동남아로 가셨다. 7시에 떠나기로 돼 있던 차가 11시부터 출발하고 어려운 사람들이지만 바가지를 씌우려 하고 가는 곳마다 접하는 힘들게 사는 모습… 스님은 여행지에서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자격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아무것도 없이 외로운 넋만 떠나는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런 외로움 속에 어떤 사람의 진가가 나올 것”이라며 “그런 여행이 방안에서 수행하는 것보다 값질 수가 있다”고 했다.스님은 “여기까지 오셨으니까 큰 절 구경이나 시켜드리겠다”며 손수 송광사 구석구석을 안내해 주셨다.‘벌교에서 주먹자랑 말고, 순천 가서 인물 자랑하지 말고, 여수 가서 돈 자랑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현봉 스님은 “‘순천의 인물’이란 송광사에서 배출한 큰스님들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스님은 고등학교 때 경남 대표로 고전 읽기 대회에서 참가 대학생들과 겨뤄 입상하기도 했다. 순천에서 오래 살아서인지 스님은 경상도와 전라도 방언이 섞인 듯한 말씨를 썼다.스님은 학승이자 선승이다. 영남 유림의 맥을 이은 조부의 영향으로 한학 바탕이 튼튼한 상태로 스님이 됐다.

스님은 구산 스님에게 비구니계를 받았다. 구산 스님은 “나무를 하고 밥을 짓더라도 화두를 놓치면 수행승이 아니라 나무꾼, 부엌데기에 불과하다”는 가르침을 주셨다. 구산 스님은 또한 “너는 절대, 주지니 방장이니 그런 거 하지 말고 평생 공부만 해라. 그거 다 쓸데없다. 지 공부하는 게 최고다”라는 말씀도 하셨다. 현봉 스님은 스승의 말을 명심하고 살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2000년에서 2003년까지 4년간 송광사 주지를 지내기도 했다. 승용차 없이 주지 소임을 수행했다. 신도 한 분이 억지로 차를 마련해 드렸으나 팔아서 살림에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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