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청장살리기 경찰죽이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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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서울경찰청장이 학력 위.변조 시비 끝에 취임 3일 만에 물러났다. 경찰사상 처음 있는 진기록이다.

이는 개인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불명예이기도 하지만 해당 기관의 입장에서도 보통 충격이 아닐 것이다.

특히 경찰은 지휘에 따라 움직이는 조직인 만큼 뒤숭숭한 분위기나 사기 저하로 인한 부작용도 결코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 치안정감 몽땅 관뒀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번 인사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역편중을 지적한다. 외형상 숫자는 지역 균형을 이뤘지만 특정지역 요직 독점이 심화됐다는 의미다. 그러나 지역편중보다 더 심각한 부분이 있으니 바로 치안정감의 싹쓸이 퇴진이다.

치안정감은 경찰청장(치안총감) 바로 아래 계급이다. 최소한 20년 이상 경찰에 몸담아온, 전국에 3명밖에 없는 경찰 최고급 인력들이다.

신체에 비유하면 머리와 같은 존재다. 이처럼 중요한 인력으로 한창 국가와 조직을 위해 경륜을 발휘해야 할 사람들을 한꺼번에 옷벗긴 것은 국가적 낭비요, 인력.조직관리에 구멍을 뚫는 것과 다름없는 무모한 일이다.

최고 우두머리인 경찰청장은 그대로 있으면서 아무 잘못도 없는 차하급자 전원을 퇴직시켰으니 청장을 살리기 위해 경찰 조직을 죽인 셈이다.

치안정감 3명이 동시에 책임져야 할 정도의 일이 있었다면 먼저 경찰청장부터 물러나는 게 순서였다.

이들의 퇴진은 유임된 이무영(李茂永)경찰청장과 경쟁 관계였기 때문이라는 게 중론이다. 하지만 조직의 위계질서나 일선 간부들의 사기를 고려하면 있을 수 없는 인사다.

이에 따르는 부작용을 모를 리 없었을 텐데도 무리수를 둔 배경은 무엇일까. 인사권자가 이같은 내용을 알면서 결재했어도 문제고 몰랐다면 더욱 큰 문제다.

사실 파행인사 못지 않게 이무영 경찰청장이 비판 받아야 할 부분이 또 있다. 바로 집회와 시위 앞에서 작아지기만 하는 공권력 때문이다.

최근 민주화 물결을 타고 집회와 시위가 봇물 터지듯 하고 있고 특히 국제통화기금(IMF)사태 이후 더욱 잦아졌지만 이에 대응하는 공권력은 점점 느슨해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과거 독재정권 아래서는 경찰이 원천봉쇄 등 지나치게 시위대를 적대시하더니 요즈음은 거꾸로 지나치게 무골충처럼 흐느적거린다는 것이다.

그 좋은 예가 시위 현장에 여경(女警)을 투입하는 소위 '스마일 운동' 과 최루탄을 쏘지 않는 무탄(無彈)작전이다.

불법.폭력시위에 여경 투입과 무탄 대응은 경찰의 인기전술에 불과하다고 본다. 여경을 투입해도 괜찮을 정도의 집회나 시위라면 교통소통을 위해서라도 경찰력은 전혀 배치하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

바로 몇m 뒤에 수많은 무장병력을 삼엄하게 배치해 놓고 여경을 시위대와 마주하도록 최전방에 투입하는 것이 무슨 의미를 지닐 것인가.

무탄작전도 마찬가지다. 시위대가 휘두르는 각목에 맞기만 하는 전경들의 모습은 애처롭다 못해 분노가 치민다. 무엇 때문에 공권력이 시위대 앞에 꼬리를 내리고 눈웃음을 쳐야 하는가.

얼마 안있어 경찰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최루탄을 쏘지 않았다고 업적을 자랑할 것이다. 그렇지만 불법 폭력시위에다 고속도로 점거사태까지 잇따라 일어나고 부상한 여경과 전경들이 경찰병원에 누워 있는 한 이는 업적이 아니라 직무유기로 처벌받아야 할 대상이다.

그러잖아도 교통체증이 심한 도심 도로가 툭하면 시위 때문에 몇시간씩 막혀 천불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는 말없는 다수 시민들의 심정도 헤아릴 필요가 있다.

*** 흐느적거리는 공권력

치안행정이 일반행정과 다른 특징은 그 시점에 현장에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사후 보완이 어렵다는 점이다.

경찰에 강제집행적 성격을 띤 업무가 많고 특히 민주적 통제가 필요하다는 것도 모두 이 때문이다.

또 일반 조장행정이 이익배분의 사회적 형평성에 기준을 둔다면 치안행정은 합법성, 즉 준법질서 확립이 이에 해당한다.

엄정한 법집행.질서확립은 공권력의 기본임무다. 경찰이 이를 포기한다면 바로 치안 공황상태가 된다.

경찰관 비리가 피부병이라고 한다면 시위대 앞에서 꼬리 내리는 법집행은 심장병 수준이다. 시위대가 고속도로 점거를 위해 풀어놓은 돼지를 쫓아다니며 우왕좌왕하는 공권력 모습을 더 이상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권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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