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아시아 통화 왜 불안한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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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최근 아시아 통화가치가 하락하고 있다. 필리핀.태국.인도네시아의 통화가치가 불안한 모습을 보였고 그동안 안정세를 보였던 대만과 우리나라의 통화가치도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통화불안이 제2의 외환위기로 전환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들 통화가치를 불안하게 한 요인들을 꼼꼼히 살펴본다면 최근의 아시아 통화불안이 외환위기로 번질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보인다.

아시아 통화가치를 불안정하게 한 요인들로 먼저 외환시장의 유동성 결여와 환율제도의 변화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아시아 외환시장의 유동성 감소는 시장 조성자 역할을 담당했던 헤지펀드의 몰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지난 1997년 동남아 통화위기 발생 이전만 하더라도 아시아에서 달러 자금을 공급함으로써 외환시장의 유동성을 증대시키는 역할을 해오던 헤지펀드들?98년 11월 LTCM사의 몰락 이후 대거 부도에 직면하게 됐다.

이러한 헤지펀드사들의 부도는 아시아 신흥금융시장에서 달러자금 공급부족을, 달러의 공급부족은 다시 외환시장의 유동성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일반적으로 유동성이 작은 시장에서는 조금만 악재가 발생하더라도 환율이 급등하는 현상이 일어나곤 한다.

또한 변동환율제의 도입과 같은 환율제도의 변화가 최근 환율변동의 주된 요인이라 할 수 있다. 말레이시아 및 대만을 제외한 아시아 국가들은 지난 외환위기 발생 이후 고정환율제와 같은 경직된 환율제도를 버리고 신축적인 변동환율제도를 채택했다.

변동환율제도 아래에서는 외환 관련 변동요인이 발생하면 그 영향이 환율에 즉각 반영되며 이러한 과정에서 환율의 변동은 필연적이다. 최근 아시아 환율의 움직임은 이러한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경직된 환율제도 아래에서 환율 절하 압력이 발생할 경우 곧바로 환율에 반영되지 않고 누적되는 경향이 있다.

외환보유액이 소모되는 순간 누적된 절하 압력은 환율에 일시에 반영될 수밖에 없는데, 이때 환율은 매우 급격하게 폭락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고정환율제도가 붕괴되는 시점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아시아 통화가치의 변화는 외화유동성이 줄어든 가운데 정치적 불안요인과 같은 악재가 환율에 자연스럽게 반영되는 과정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통화불안 요인들과 관련해 환율 움직임의 정도와 건전한 거시경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작금의 아시아 통화가치의 불안이 외환위기의 발생으로 전환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본다.

먼저 그동안의 환율 변화폭이 그리 크지 않다는 점이다. 최근 아시아 통화가치는 대략 연초대비 6~7% 정도 하락했는데 이는 유로화의 가치가 달러 동년 대비 15% 정도 하락한 사실과 비교해보면 그리 우려할 바가 아니라고 본다.

또한 97년 말 외환위기가 우리나라에 들이닥쳤을 때 외환위기 상황과 비교해보면 더욱 그러하다. 97년 10월께 달러당 9백원에 머물던 원화가치가 12월께 한때 달러당 2천원으로 폭락한 경험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또한 현재의 거시경제 여건은 지난 외환위기 발생 이전의 상황과 비교해 볼 때 전혀 다른 양상이다.

현재 대부분의 국가들이 무역흑자를 보이고 있으며 미래 위기발생에 대응할 만큼 충분한 외환보유액을 확보하고 있다.

또한 변동환율제도를 채택하고 있어 환율의 신축적 조정이 가능하다는 점은 위기 발생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도록 해준다.

따라서 아시아의 최근 환율 움직임은 국별로 정도 차이가 있지만 기초 경제여건이 비교적 건전한 가운데 환율제도가 변동환율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외환시장의 단기적이고 기술적 반응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며 과거와 같은 외환위기로 번질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본다.

임준환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국제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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