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대 서울 종로의 땔감장수를 찍은 사진. 10살 남짓한 아이 둘이 나뭇짐을 잔뜩 실은 소 한 마리씩을 끌고 와 고객을 기다리고 있다.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캐러멜·과자·사이다 등 부피가 작고 가벼운 새 상품이 나온 뒤에는 이들이 ‘소년 행상’의 주력 상품이 되었다. (『사진으로 본 한국백년』)
우리나라에서는 어린이를 ‘아이’ ‘아해’ 또는 ‘동몽(童蒙)’이라 불렀는데, 몽(蒙)이란 덩굴풀의 일종으로 그늘지다, 어둡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래서 어리석은 것을 몽매(蒙昧)하다 하고 그를 깨우치는 일을 계몽(啓蒙)이라 한다. 어린이는 단지 지적으로만 덜 깬 사람이었을 뿐, 육체적으로는 어른과 별로 다를 바 없는 대우를 받았다. 10살 안팎의 사내아이들이 소 먹이고 나무하고, 그 나이 또래의 여자아이들이 아이 보고 빨래하는 일은 지극히 당연했다.
1920년대부터 어린이라는 말이 생기고 어린이를 ‘미래의 동량(棟樑)’으로 잘 키우자는 사회적 계몽이 확산되었지만, 유년 노동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일자리들이 가정 밖에서 어린이의 일거리를 늘렸다. 1931년 통계에 따르면 30인 이상을 고용하는 공장 노동자 중에서 15세 미만의 어린이가 점하는 비중은 8%에 달했다. 청장년들이 징병·징용으로 끌려간 1940년대에 그 비중은 20%까지 늘어났다.
1934년 2월 10일, 서울 종로경찰서 보안계 주임 고사카(小坂)는 거리에서 행상하는 소년 소녀들을 단속하겠다고 밝혔다. “8~9세 아이들이 장사치가 되어 과자와 캐러멜 등을 억지로 사달라는 것은 일반에게 불쾌한 감정을 줄뿐더러 소년 보호와 교양상 큰 문제이다. 소문으로는, 불량한 가정에서는 어린아이들을 영업적으로 장사를 시켜 그 수입으로 어른들이 술을 사다 먹는 일까지 있다고 한다. 이는 순진한 아이들의 선량한 동심을 어지럽히는 일이고 또 제2세 국민의 교화 문제로도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생계를 잇고자 거리에 나온 아이들을 무작정 잡아 들이는 것 말고 경찰이 할 일은 없었다.
한국 사회가 전례 없는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 오늘날에도 밥 굶는 어린이가 적지 않고 ‘알바’ 자리를 찾아 헤매는 청소년은 셀 수 없이 많다. 어린 자식이 벌어 온 알바비로 술 먹는 부모가 지금에라고 없으란 법은 없지만, 대개는 가난이 시키는 일이다. 출산율을 높이려면 먼저 자식의 미래에 대한 걱정부터 덜어 주어야 한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