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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막작 '주홍글씨'로 돌아온 한석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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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이제 좀 쓸만해 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배우 한석규(사진)는 올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인 '주홍글씨'에 출연한 소감을 그렇게 요약했다. 그리고 "10년 동안 영화 열 편을 찍고, 나이도 마흔이 되니 좀 어른이 된 느낌"이라고 말했다.

'닥터봉'으로 1994년 영화에 뛰어든 그는 '초록물고기''접속''8월의 크리스마스''쉬리'등 잇따른 히트작으로 승승장구했다. '관객 동원력 1위'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녔다. 그러다 지난해 4년 만에 출연한 '이중간첩'이 흥행에 실패했다. 또 최근에는 형 선규씨가 제작을, 자신이 주인공을 맡은 영화 '소금인형'이 예산 부족 등으로 제작이 중단되는 아픔까지 겪었다.

그는 "뭔가를 잃으면 반드시 얻는 게 있는가 봅니다. '주홍글씨'에 나타난 내 모습을 보면서 '괜찮다'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지금까지 영화에 나타난 내 표정은 좋아하는 얼굴이 아니었죠"라고 밝혔다. 그만큼 성숙해졌다는 의미였다.

"인간의 탐욕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는 주제가 마음에 들었고, 도시적이고 세련된 분위기도 좋아 이번 영화를 택했습니다. '접속'이후 이런 도시적 분위기의 영화가 별로 없었죠?"

그의 얘기는 계속됐다. "버리려야 버릴 수 없는 욕심, 그럼에도 결국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현실, 그 속에 자기가 놓은 덫에 자기가 걸리는 한 남자를 표현하기 위해 뭔가를 토해내듯 연기했습니다."

'주홍글씨'는 불륜의 치정극과 살인 미스터리를 혼합한 독특한 영화. 한석규는 국회의원의 사위이자 경찰대 출신 강력반 반장으로 남 부러울 게 없는 기훈으로 나온다. 부인(엄지원)과 애인(이은주) 사이를 오가며 위험한 애정 행각을 벌이는 기훈. 그는 사진관 주인 피살 사건을 맡아 사진관 주인의 부인(성현아)을 수사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살인 사건에 비추어 본다. 단편 '호모 비데오쿠스'(이재용 감독 공동연출)로 여러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받고, 장편 '인터뷰'로 주목받았던 변혁 감독이 연출했다.

한석규는 "뭔가를 남기는 영화입니다. 절대 허튼 영화가 아니죠"라고 단언했다. "차 트렁크에 갇혀 있는 장면이나 격정적인 베드신 등 어려운 대목도 많았지만 정작 힘들었던 건 '내가 주제를 잘 표현하고 있느냐'하는 고민이었습니다. 지금은 결과에 70% 이상 만족해요."

그는 기존 출연작 아홉편 가운데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으로 '8월의 크리스마스'를 꼽았다. 실제 그의 모습과 가장 닮았다는 것이다. "따뜻하면서도 차갑고,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캐릭터가 있다는 말을 듣는데, 4형제 중 막내라는 성장 환경이 일부 작용한 것 같습니다. 나머지는 타고난 본성이겠죠. 그런 저의 내면을 포장하고 덧씌우기보다 그대로 간직하고 보여주고 싶습니다."

한석규는 14일 부산에 머리칼을 짧게 깎고 나타났다. '주홍글씨' 속의 모습과 대조적이다. "영화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싶었다"는 게 이유였다. 하지만 곧바로 "얼마 전 호적등본을 떼 보니 제 밑으로 아내와 세 아이가 있는 것을 보고 책임이 무겁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흔은 그런 나이죠"라고 말을 바꿨다. 자유와 평온을 동시에 추구하는 욕망의 이중성, 그건 영화 '주홍글씨'의 주제이기도 하다.

부산=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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