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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집어 본 정치] 집권당 대표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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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맞는 국정 혼선은 서영훈(徐英勳)대표 등 당 지도부의 역할 부재탓이 크다." 민주당에서 나오는 자책의 소리다.

집권 여당 대표는 당 총재인 대통령을 대신해 당을 맡는다. 권력 서열상 '2인자' 대접도 받을 수 있는 자리다.

여당 대표가 여론의 주목을 받는 시점은 정국이 제대로 굴러갈 때보다 헝클어질 때다. 위기관리 능력을 보이면 위상을 강화할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초라한 퇴장을 한다. 국정 난맥과 집권당 대표간의 미묘한 함수 관계다.

김영삼(金泳三.YS)정권 시절인 1995년 1월 김종필(金鍾泌.JP)당시 민자당대표가 물러났다. 그때 YS의 국정 관리 스타일을 둘러싼 '인치(人治)와 독선' 논란으로 정권 지지율은 뚝 떨어져 있었다.

YS가 국면 전환을 위해 꺼낸 카드가 바로 'JP의 2선후퇴' 였다. 이 카드는 JP의 정치생명을 연장해준 셈(자민련 창당으로 충청권 지방선거 승리)이 됐지만 JP로선 수모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JP가 그런 불명예를 자초한 측면도 있다. JP는 "대통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 며 있는 듯 없는 듯 처신했다.

민심이 나빠져도 직간(直諫)하지 않았고, 정책혼선을 바로잡기 위해 나서지도 않았다. 때문에 최형우(崔炯佑)당시 내무장관 등 민주계로부터 "대표 자격이 없다" 는 비난을 받았고, 결국 용도폐기됐다.

여당 대표가 국정혼선을 기회로 삼아 입지를 강화한 사례도 있다. 바로 YS다. YS는 민자당 대표시절인 91년 4월 강경대군 사망사건 때 노재봉(盧在鳳)총리의 인책 사퇴를 밀어붙여 관철했다.

YS는 "인사쇄신이 민심" 이라며 노태우(盧泰愚)대통령을 압박했다. 이로써 YS는 부담스러웠던 盧총리를 제거하고 후계구도를 유리하게 다듬어갈 수 있었다.

87년 6월 노태우 민정당대표도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으로 악화한 민심을 반영, 내각 책임론을 확산시켰다.

잠재적 후계 경쟁자였던 노신영(盧信永)총리는 물러났다. 盧전대통령은 대표 시절 JP 스타일의 처신을 했지만 결정적 시기에 민심상황을 이용, 후계자 자리를 굳혔다.

서영훈 대표를 과거의 대표들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다. 徐대표가 차기주자도 아니고, 세(勢)를 가진 정치인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徐대표가 돌아봐야 할 대목이 있다. 왜 대표 교체론이 나오는가다. "徐대표의 당 장악과 정국관리 자세에 상당한 문제가 있다" 는 게 당내 지적이다.

이화여대 김석준(金錫俊.정치행정학)교수는 "여당 대표가 실세든 아니든 국정운영에 큰 책임이 있다" 며 "徐대표가 민심 흐름에 적극 대처하면 적어도 JP같은 수모를 겪지 않을 것" 이라고 말했다.

이상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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