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1. 샛강<1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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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 상이용사 된 주인집 총각 우연히 만나

그리고 오랫동안 내 기억 속에서 '김밥'은 유랑자의 음식이었다. 김밥이라니 그 정도면 굶주린 난리통에 얼마나 고급인데. 하긴 그렇다. 주먹밥에서 통밀 개떡이나 범벅, 수제비, 나중에는 꿀꿀이죽까지 등장했지만 그래도 김밥은 난민의 대표적인 길 음식이었던 셈이다. 김밥이래야 그저 해초가 뒤섞인 막김에 보리밥 가운데에 신김치나 무짠지를 드문드문 박아 넣은 것이었다.

다다미방, 오시이레의 나프탈린 냄새, 마른 김에 싼 한 덩이의 밥, 먹을 것 앞에서의 경건한 기도 등이 이 시절 흘러가버린 것들 속에 뚜렷이 남아있다.

큰누나는 작은누나나 나처럼 피동적으로 부모들의 보호막 속에서 그저 자기 생각만 하며 자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우리보다 훨씬 많은 부모의 비밀을 뒷전에서 넘겨다보며 자랐다. 우리 부모는 평양에서 떠날 때 귀금속 따위며 서울에 와서 자립을 할 만한 물건들을 챙겨온 듯 했다. 이남에 오자마자 아버지가 점포를 열거나 집을 장만하거나 뭔가 시작하려고 목돈을 준비했던 모양인데 어느 날 잠깐 이층의 큰방을 비운 사이에 몽땅 잃어버리고 말았다. 당시에 갓 시집을 간 듯한 주인집 딸이 자주 찾아 왔는데 누나의 말에 의하면 그 여자가 훔쳐간 게 분명하다고 했다. 우리가 그 집에서 이사를 갈 때까지 그 여자는 다시는 한번도 찾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의식만이 중산층적이었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러한 생활을 회복하기 위해 평생 애를 썼지만 뿌리를 뽑히고 나서 처음 시작부터 거덜이 났던 그들로서는 다시 회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고 한계가 있었다.

그 다음이 서울의 변두리였던 영등포, 또 그 변두리였던 구로동 부근이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제법 맑고 모래밭이 깔끔하던 시흥천변과 다리며 철길이 생각난다. 사방이 온통 논밭이었고 언덕 자락에 작은 초가 마을들이 흩어져 있었다. 눈이 강산같이 내린 어느 겨울날 학교에 갔던 누나들이 발갛게 얼어서 울며 돌아오던 날도 있었다. 아마도 만주 시절에 챙겨 놓았던 것인지 솜을 누벼 넣은 두툼한 상의를 걸치고 등교했던 누나들은 아이들이 '짱꼴라 되놈'이라고 놀린다고 다시는 입으려 하지 않았다. 주인집 부부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집의 아우였다던 총각은 생각난다. 아마 열 일곱 여덟살쯤 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서 말린 감 껍질을 얻어먹었고 처음으로 술 지게미를 얻어먹고 얼굴이 화끈해지고 자꾸만 졸려서 혼이 났다. 총각은 또 처마 아래 짚 틈으로 손을 넣어 참새를 잡아내고는 아궁이에서 구워주었다. 그는 이를테면 내 집안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활기를 가진 첫 번째 토박이였던 셈이다. 나중에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뒤에 어머니가 우연히 영등포 시장 모퉁이에서 상이용사가 된 그를 만났다고 한다.

이제 '가죽나무 집'으로 들어선다. 그 집은 아버지가 길가의 낡은 집을 사서 목수 한 사람과 손수 고쳐 지었던 집이다. 영등포 역과 시장에서 가까웠고 바로 그 중간에 있던 로터리를 지나 당산동 쪽으로 곧장 내려오던 길가에 있었다. 원래는 자전거포였다. 점포와 살림방이 붙어 있고 뒤켠에 제법 너른 공터가 있었다.

그림=민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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