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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의 양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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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양심(conscience)은 공동체성을 나타내는 con(함께)과 이성을 뜻하는 scientia(앎)의 합성어다. 양심은 ‘사회공동체의 이성적 윤리의식’이다. 그래서 양심은 실정법의 세계로 들어온다. 헌법은 모든 국민의 ‘양심의 자유’를 보호하면서(제19조), 법관에게는 ‘법률과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할 것을 요구한다(제103조). 두 조문의 양심은 의미가 같지 않다. 앞의 것은 개인의 기본권으로 주관적·인격적인 것이고 뒤의 것은 법관이 따라야 할 재판의 준거(準據)로서 객관적·규범적인 것이다.

최근 이념적으로 민감한 사안에서 젊은 단독판사들의 무죄판결이 잇따르자 각계의 비판이 거세다. 민주사회에서는 판결도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비판 역시 적정한 한계를 지녀야 한다. 사법의 독립을 훼손할 정도의 거친 항의나 지나친 여론몰이는 온당한 비판이라고 볼 수 없다. 비판에도 절제가 필요하다.

다만, 차제에 법관들에게도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헌법이 재판의 준거로 제시하는 양심은 ‘공동선(共同善)을 지향하는 보편적 윤리규범’으로 주어진 것이지 법관 개인의 자유나 권리로서 주어진 것이 아니다. 법정(法廷)은 법관의 주관적 신념을 펼치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법관은 시민사회의 소박한 법감정 앞에서 자기의 소신을 꺾을 수 있어야 한다. 영미법이 배심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이유다. 겸손은 법관의 필수 덕목이다.

법조의 경험과 연륜이 짧을수록 겸손의 덕목은 더욱 절실하다. ‘젊은 양심’은 비록 순수해도 가벼움을 벗기 어렵다. ‘성숙한 양심’이라면 삶의 애환(哀歡), 연륜의 무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문(人文)의 깊이가 그윽이 담겨 있게 마련이다. 나도 젊은 나이에 단독재판을 담당했지만, 돌이켜보면 두렵도록 아찔한 기억이 적지 않다.

재판심리를 영어로 hearing이라고 한다. 재판은 ‘말하는 것’이기 전에 ‘듣는 것’이다. 자기의 양심에 도덕적 절대성의 면류관을 씌워놓고 제 생각과 다른 목소리에는 귀를 닫아버리는 오만한 태도를 양심적이라 할 수 없다. ‘오만한 양심’은 그 자체로 비양심적이다. 객관성·보편성과 소통하지 못하는 양심은 결국 배타적 독선으로 흘러 상생(相生)을 가로막고 상쟁(相爭)을 불러오기 일쑤다.

논란을 불러온 법관들도 무엇이 정의인지를 나름대로 고민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의의 영토는 무한하지 않다. 정의는 보편적 이성의 합의를 경계로 하여 그 안쪽에 존재한다. 그래서 로마의 법언(法諺)은 ‘극단의 정의는 극단의 불의’라고 꾸짖는다.

법관은 국민의 선거로 선출되거나 심판받는 직분이 아니기에 자기성찰에 누구보다도 엄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법정에서 아버지뻘의 어른을 ‘버릇없다’고 꾸짖은 젊은 판사는 정작 자신의 버릇없음은 알지 못했다. 자기성찰의 문제다.

법관의 양심은 법전에서 나오지 않는다. 양심은 인격이다. 사법시험 하나로 인격을 검증할 수는 없다. 사법연수원 재직 시절, 연수생들에게 법률실무에만 매달리지 말고 인문의 소양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누차 강조했지만, 실무평가에 노심초사하는 그들에게는 마이동풍(馬耳東風)일 수밖에 없었던 기억이 선하다.

판결문은 어떤 결론으로도 쓸 수 있을 것이다. 동원할 수 있는 법리와 판례도 수두룩하다. 증거판단과 사실인정도 법관의 심증에 크게 좌우된다. 법실증적인 면에서는 어떤 판결도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올바른 재판이겠는가? 법학자 라드브루흐는 보편적 법의식을 외면하는 법실증주의에 대해 ‘법철학의 안락사’라고 개탄했다.

이념의 붓에 독선의 먹물을 찍어 써 내려간 판결문이라면, 아마 파스칼의 야유를 만날지도 모르겠다. ‘피레네 산맥 이쪽의 정의가 저쪽에서는 불의다.’

사법부 스스로 이번 사태를 엄중한 자기혁신의 계기로 삼지 못하면 거센 외풍에 시달리지 않을까 염려된다. 나는 대한민국의 법관들을 신뢰한다. 이 신뢰가 헛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언론과 정치권에도 이성적 비판의 금도(襟度)를 기대한다.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전 서울중앙지법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