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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세종시, 미국의 건강보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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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상대방을 악마로 만들면 이 사회에 진전은 없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4일 건강보험 개혁을 둘러싼 극심한 대립을 빗대 한 말이다. 내용과 배경은 크게 다르지만 한국의 세종시 수정과 미국의 건강보험 개혁은 닮은 구석이 많다. 우선 ‘역사적 소명’을 앞세운 대통령의 적극적인 드라이브, 야당의 결사적 반대, 여당 내 의견 불일치라는 정치판 구도가 일치한다. 블랙홀처럼 다른 사회 현안들을 뒷전으로 내몰면서 나라 전체가 국론 분열 양상으로 치닫는 상황도 비슷하다.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다는 점 또한 공통점이다. 특히 지난달 열린 매사추세츠주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공화당의 지연 작전을 막을 수 있는 귀중한 의석 1개를 잃음으로써 건강보험 역시 세종시처럼 꽉 막혀 버렸다.

지난달 오바마 취임 1주년을 맞아 싱크탱크 전문가들에게 오바마의 가장 큰 업적 1개, 가장 뼈아픈 실책 1개를 꼽아달라고 했다. 진보쪽 인사는 건강보험 개혁 추진을 업적으로, 아프간 추가 파병을 실책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보수쪽 인사는 정반대로 아프간 파병을 업적으로, 건강보험을 둘러싼 초당적 국정운영 전통의 파괴를 실책이라고 했다. 세종시처럼 건강보험이 미국 사회에서 얼마나 접점을 찾기 어려운 사안인지를 느끼게 해주는 사례다.

오바마는 1년 동안 건강보험 개혁 성취를 위해 다양한 전략을 구사했다. 처음엔 개혁의 명분을 호소하는 데 주력하고 구체적인 작업은 의회에 맡겼다. 정부 주도로 나섰다 좌초한 빌 클린턴의 전철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뒤에선 긴박하게 움직였다. 수시로 의원들을 만났다. 그러나 공화당의 협조가 쉽지 않았다. 오바마는 결국 의석수의 우위를 활용하기로 마음먹고 집안 단속에 집중, 상원과 하원에서 각각 법안을 통과시켰다. 오바마의 승리가 목전에 다다른 상황에서 민주당 아성이던 매사추세츠의 주민들이 마지막 통합 법안 통과에 일격을 가했다. 선거 전문가들은 당파적 국정운영, 법안 통과 시 비용 증가에 대한 우려를 씻지 못한 게 이유라고 분석했다. 좌절한 오바마는 “단임 대통령이어도 좋다”고 넋두리했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공화당 의원들에게 달려가고 있다.

가장 간과하기 쉬운 세종시와 건강보험의 공통점은, 둘 다 입법사안이라는 점이다. 대통령의 행정권으로 되는 게 아니라 의회가 법을 통과시켜야 하는 문제다. 의원 과반수가 반대하면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러니 최종 책임자는 의원들이다. 세종시가, 건강보험이 어떻게 결론 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이를 다루는 한국 국회와 미국 의회의 모습은 달라 보인다. 첫째, 미 의회 지도자들은 “누더기 법을 만드냐”는 욕을 먹으면서도 타협점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대화하고 있다. 둘째, 535명의 상·하원 의원 전원이 건강보험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왜 반대하는지, 어떤 조항을 바꾸면 찬성할 것인지 미 국민들은 모두 알고 있다. 세종시 문제는 그래서 우리 의회 문화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김정욱 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