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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는 더 묵직한 벨트 … 왕좌 버리고 도전자의 길로

중앙일보

입력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지난해 9월 국제복싱기구(IBO) 타이틀을 안고 귀국하는 김지훈. 눈가에 짙은 멍자국이 격전의 흔적으로 남았다. 그러나 그는 어렵게 따낸 타이틀을 미련 없이 버렸다. 더 큰 타이틀을 원하기 때문에.

한국 복싱의 유일한 세계챔피언 김지훈이 타이틀을 반납했다. 23세 청년은 작은 챔피언보다는 큰 도전자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체급을 올리고 강자들이 득실거리는 무대로 뛰어들었다. 김지훈은 2월 12일(현지시간) 미국에서 타이론 해리스(28·미국)와 대결한다. WBC(세계복싱평의회) 논타이틀전으로 열리는 이 경기는 스포츠 전문채널 ESPN이 미국 전역에 생중계한다.

김지훈은 여전했다. 무명의 도전자일 때도, 지난해 9월 IBO(국제복싱기구) 수퍼페더급(58.97㎏ 이하) 챔피언에 올라 깜짝 스타가 됐을 때도, 챔피언 벨트를 내려놓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를 지도하고 있는 김형열(56) 일산주엽체육관장은 “저 녀석은 항상 똑같다. 아마 통합챔피언이 되기 전까지는 표정 없이 우직하게 훈련만 할 것”이라고 전했다.

김지훈은 “이미 반납한 챔피언 벨트엔 미련이 없다. 더 큰 꿈을 위해 다시 뛰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적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따낸 벨트를 4개월 만에 스스로 내려놓기는 쉽지 않았다. 김 관장은 “IBO에서 방어전을 치르라고 몇 차례 요청했다. 지훈이도 챔피언으로서 방어전을 치러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도전의 매력이 더 커 챔피언 자리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IBO가 국제기구이기는 하지만 아직 WBC나 WBA(세계권투협회)·WBO(세계복싱기구) 규모에 미치지 못한다. ‘챔피언’이라는 명함을 얻기 위해 들른 기착지였을 뿐 목적지가 될 수 없었다. 또 수퍼페더급에서는 스타급 선수들이 많지 않다. 현 체급을 유지한 채 방어전에서 이겨 봐야 발전이 더딘 마이너 챔피언에 머물지 모른다는 현실 인식도 있었다.

소속사인 배너(Banner) 프로모션은 김지훈의 미국 진출을 설득했다. 체급을 라이트급(61.23㎏ 이하)으로 올리고 메이저 기구 챔피언에 도전하라고 권유했다. 망설임은 짧았다. 평소 체중 67㎏인 김지훈은 라이트급에서 최고의 기량을 발휘한다. 그의 목표는 라이트급 통합타이틀전을 벌이는 것이다. 당장 누구와 싸워도 이길 자신이 있는 만큼 소속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김지훈과 해리스 경기는 ‘ESPN 프라이데이 나이트 파이트’ 메인 이벤트로 열린다. 이 경기는 세계타이틀 전초전이 될 가능성이 크다. 배너 프로모션은 이르면 4월, 늦어도 가을 이전에 김지훈의 세계타이틀전을 추진하고 있다. 김지훈은 처음부터 쉽게 복싱할 생각이 없었다. 잔매를 열 대 맞더라도 큰 펀치 한 방을 노리는 그의 복싱 스타일처럼 향후 대진도 그렇게 풀어갈 생각이다.

체급을 올렸다지만 그는 여전히 8㎏ 정도를 빼야 한다. 지난주부터 본격적인 감량을 시작했다. 키 1m76㎝인 김지훈의 감량 프로그램은 고통의 연속이다. 상의 네 겹, 하의 세 겹으로 땀복을 겹쳐 입고, 양말까지 덧신은 채 3시간 동안 쉬지 않고 줄넘기를 하고 샌드백을 친다. 그래봐야 250g 남짓 빠진다. 먹는 즐거움을 잊고 산 지 오래다. 물 한 모금도 마음껏 마실 수 없어 꿈에선 밥도 아닌 물을 들이켠다고 한다.

김지훈은 스무 살 때부터 이런 과정을 반복했다. 감량이 힘들어서 타이틀을 반납한 건 물론 아니다. 수퍼페더급에 몸을 맞추다 보면 지방이 죄다 연소될 뿐만 아니라 수분과 기력까지 빠져나가기 때문에 자신의 최적 체급을 선택한 것이다.경쟁자들은 스스로의 한계치까지 감량한 상태로 링에 선다. 하위 체급에서 싸울 때보다 키가 크고 팔이 긴 선수와 맞붙을 확률이 높아진다. 군살이 붙지 않은 23세 유망주가 체급을 올리는 건 그래서 모험으로 간주된다.

김지훈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젊지만 24전(19승5패)을 치른 베테랑이다. 또한 현재 기량이 정점에 올라 있다고 믿는다. 타이틀에 안주하기보다 정글에 일찍 뛰어들고 싶어한다. 복싱 관계자들은 김지훈의 전성기가 이미 시작됐다고 평가한다. 오랜만에 한국에서 나온 세계 수준의 복서이며, 미국 팬들의 환호를 이끌어 낼 수 있는 화끈한 인파이터다. 무엇보다 적은 나이에도 기량이 최고조에 올라 있어 기존 라이트급 강자들을 끌어내릴 수 있는 세대교체 주자로 손꼽힌다.

반대로 생각하면 김지훈의 도전은 한국 복싱의 척박한 현실을 대변하기도 한다. 그가 한국 복싱의 황금기였던 1980년대 챔피언이었다면 충분한 지원을 받으며 차근차근 커리어를 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 규모가 몇 배 커진 현재 한국의 세계챔피언은 30년 전 수준과 거의 같은 파이트머니(1만~2만 달러)를 받는다. 김지훈이 국내 유일의 세계챔피언이 된 후에도 스폰서가 나서지 않았다. 만약 현실에 안주하고 싶었다고 하더라도 그럴 형편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배너 프로모션은 김지훈에게 “너는 잠재력이 뛰어난 복서다. 당장 세계 정상급 선수와 붙어도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할 것이다. 너의 경기는 HBO로 방송돼야 한다”고 설득했다. 해리스와 경기 후에는 반드시 스포츠 전문 유료 채널인 HBO가 중계할 만한 경기를 잡겠다고 약속했다. 올해 안으로 WBC나 WBA 또는 WBO 세계타이틀 매치를 기대할 수 있다.

라이트급에는 세계적인 강자들이 운집해 있다. 전 기구를 통합해 체급별 랭킹을 매기는 복스렉(www.boxrec.com) 라이트급 1위는 WBA 수퍼챔피언 겸 WBO 챔피언 후안 마누엘 마르케스(37·멕시코)다. 5체급을 석권한 무패 복서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32·미국)의 복귀전 상대로 나서 판정패했던 선수다. 메이웨더의 발놀림을 따라가지 못했지만 펀치력만큼은 최정상급이다.

에드윈 발레로(29·베네수엘라·통합 3위)는 수퍼페더급 시절 23경기 연속 KO승을 자랑한 왼손잡이다. WBC 챔피언인 그는 웰터급(66.68㎏ 이하)까지 6체급을 제패한 현존 최고의 복서 매니 파퀴아오(32·필리핀)와의 대결을 요구할 만큼 기세가 무섭다. 이 밖에 25승 무패를 질주 중인 WBA 챔피언 파울루스 모세스(32·나미비아·통합 8위)도 누구 못잖은 강타자다.

김지훈은 맹수들이 우글대는 정글로 뛰어들었다. 이전까지 주요 경기는 모조리 적지에서 치렀던 그이기에 체급을 높이는 것도 강자와 만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배너 프로모션이 김지훈을 적극적으로 키워내려는 의도도 여기에 있다. 미국인에게 낯설어 당장은 흥행성이 떨어지고, 관리 비용도 많이 드는 한국인이지만 일찌감치 미국 무대로 끌어와 크게 키워내겠다는 전략이다. 라이트급 강자들은 대부분 30세 전후다. 통합 랭킹 20위 내 모든 선수는 김지훈보다 나이가 많다. 젊은 도전자가 기존 챔피언들을 차례로 꺾는 시나리오를 쓴 것이다.

손에 쥔 것을 놓을 줄 알아야 더 큰 기회를 잡는 법이다. 어린 김지훈도 그걸 안다. 그는 “처음부터 내 꿈은 체급 넘버원, 통합챔피언이었다. 이전 타이틀을 잊고 다시 도전하겠다. 언젠가는 세계 최고라고 추앙받는 파퀴아오와 대결하고 싶다. 그의 펀치가 빠르지만 내가 더 빨리 때리면 되지 않겠는가. 꿈을 이룰 때까지 다른 생각 없이 복싱만 할 작정이다”고 말했다. 김 관장이 한마디 거들었다. “지훈이는 타고난 도전자다. 아쉬움도 두려움도 없다. 저 눈빛을 보라. 저 친구의 최대 무기는 도전정신이다.”


김지훈은 …
생년월일 1987년 1월 17일
체격 1m76㎝, 67㎏(평소 체중)
가족 부모, 2남 중 장남
출신학교 일산 신일정보산업고 부천대학(휴학 중)
주요 경력
2005년 한국권투위원회(KBC) 페더급 챔피언
2006년 범아시아권투연맹(PABA) 페더급 챔피언
2009년 국제복싱기구(IBO) 수퍼페더급 챔피언

김식 기자 see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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