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이철호의 시시각각

북한, 아시아판 짐바브웨 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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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두 달 전 북한도 기세등등하게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어제는 노동당 재정관리부장이 숙청되고 아사자가 속출한다는 소식이 보도됐다. 화폐개혁의 후폭풍으로 여겨진다. 북한 전문 사이트들은 물가와 환율이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물품 거래마저 끊겼다고 전한다. 화폐개혁은 잘해야 본전이고 대개 엄청난 후유증을 남긴다.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기준은 공급 능력이다. 그나마 화폐개혁 2~3년 전부터 기를 쓰고 보드카·밀가루 등을 비축한 러시아도 시련을 피해가지 못했다. 북한은 어떨까. 지난해 북한의 쌀 생산량은 예년 수준인 400만t 남짓하고, 50일 전투와 150일 전투에도 여전히 공급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는 게 통일부의 판단이다. 공급 능력이 확충됐다는 흔적은 많지 않다는 것이다.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아마 ‘장마당 경제’가 쌓은 민간부문의 자금을 끌어내 경제 성장의 동력으로 삼으려 꿈꾸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미 북한 경제 규모의 30%를 차지하는 시장경제가 마비되면 공급난은 더 심해질 수밖에 없다. 물자 부족으로 인플레가 기승을 부릴수록 물건은 더 꼭꼭 숨는다. 이른바 상품의 퇴장이다. 기본적인 수요를 채우기 위해 원시적인 물물교환이 고개를 든다. 요즘 북한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화폐개혁 후유증에 대처하는 선택지는 두 개뿐이다. 하나는 짐바브웨 방식이다. 아프리카의 짐바브웨는 2006년 이후 두 차례 화폐개혁을 하면서 농장을 몰수하고 외국자본을 쫓아냈다. 돈은 줄창 찍어댔다. 인플레가 심해지자 정부는 총칼을 들이대 강제로 물건을 내놓게 했다. 상품 퇴장으로 물자 부족은 더욱 극심해졌다. 짐바브웨는 결국 강제로 일정 가격 이하로만 물건을 팔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그 결과 기업이 줄도산하면서 그나마의 공급마저 끊어졌다. 짐바브웨 경제는 2억%의 인플레로 거덜났다. 1000억 달러짜리 현지 화폐로 계란 3개 사기도 어렵다.

다른 선택지는 독일 방식이다. 독일은 패전 후 48년 6월 미국의 협조 아래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미국은 마셜플랜으로 120억 달러를 쏟아부었다. 독일 모델의 성공 비결은 신뢰다. 미 예일대 헨리 월리치 교수는 “하룻밤 사이에 독일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6월 21일부터 상점에 다시 상품들이 진열되기 시작했고, 시골로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모습도 사라졌다”고 말했다. 이후 노동 생산성이 높아지고 생산 물량이 늘어나면서 라인강의 기적으로 이어졌다.

북한이 몇 명의 희생양을 총살한다고 화폐개혁 후유증을 수습할 수 있는 단계는 지난 듯싶다. 아시아판 짐바브웨를 각오하고 또다시 고난의 행군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북한이 독일 모델을 희망한다면 한국과 중국의 협력이 절실하다. 여기에는 독일처럼 신뢰라는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이명박 대통령은 연일 정상회담 가능성을 열어놓으면서도 북핵 그랜드 바긴(일괄타결)을 압박하고 있다. 이 대통령의 “정상회담 대가는 없다”는 발언은 북쪽도 큰 보따리를 풀라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미 북한은 자살골을 넣었다. 앞으로 김 위원장의 고민은 길고 깊어질 것 같다.

이철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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