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 감축 연기 합의 럼즈펠드-정동영 회동서 실마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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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미 버지니아주 알링턴. 리처드 롤리스(사진) 미 국방부 아태담당 부차관보가 한국 언론사 특파원들을 '펜타곤(미 국방부)'으로 초청했다. 전날 발표된 주한미군 감축 합의(감축 시기를 2008년 9월까지 연장 등)에 대한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이 자리에서 그는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협상에서 큰일을 해냈다"고 말했다.

롤리스 부차관보가 이런 말을 한 데는 까닭이 있었다.

두달여 전인 8월 20일. "주한미군 감축 시기에 대해 합의를 보지 못했다"는 제11차 미래 한.미동맹 정책구상 회의(FOTA) 결과가 발표된 직후의 일이다. 롤리스 부차관보는 이날 저녁 서울의 한 특급호텔에서 정 장관을 만났다. 정 장관의 요청으로 이뤄진 만남이었다.

두 사람은 총선을 앞둔 2월 14일에도 비공개 회동을 했다. 그때도 정 장관이 만나자고 했고, 두 사람은 용산기지 이전 문제 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고 한다.

8월 만남에서 정 장관은 롤리스 부차관보에게 "미국이 (2차대전의) 전후 처리를 잘못해 한반도가 분할됐다"며 "이번에도 민감한 시기에 (미국 측) 실무자들이 생각을 잘못하면 또 비슷한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고 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 만남의 자리에 참석했던 여권의 한 인사가 전한 내용이다.

이 인사는 "정 장관의 얘기는 주한미군의 감축 시기를 2005년까지로 못박지는 말아달라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정 장관이 '이번만은 우리 입장을 들어주길 바란다'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고 했다. 그는 또 "너무 민감한 내용이라 공개하긴 어렵지만 정 장관이 남북한과 미국.중국 등을 둘러싼 동북아시아의 질서 재편 문제에 대해 설명하며 미국 측에 도와달라는 말을 했다"고 밝혔다.

그러자 잠자코 얘기를 듣던 롤리스 부차관보는 "그렇다면 내 상급자(럼즈펠드 국방장관)와 대화하는 것이 좋겠다"며 "만남을 주선하겠다"고 대꾸했다 한다.

정 장관의 방미 일정을 열흘 남겨둔 시점이었다. 당시 정 장관도 럼즈펠드 장관과의 만남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지만 그의 방미 기간이 미 공화당 전당대회 기간과 겹치는 등 사정이 나빠 만남이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 정 장관에게 롤리스 부차관보의 주선이 주효했다. 정 장관은 8월 31일 럼즈펠드 장관과 만났다. 그리고 "지난 1년간 한국이 용산기지 이전, 미군 재배치와 감축, 이라크 추가 파병 등 무려 네가지를 미국에 공헌했다"며 주한미군의 감축 시기를 조정해 달라고 했다.

이후 9월 16일 저녁 서울의 같은 호텔에서 정 장관과 롤리스 부차관보는 다시 비공개로 만났다. 이때 롤리스 부차관보는 "럼즈펠드 장관이 정 장관과 만난 뒤 '요구사항에 설득력이 있다'며 면담 내용을 부시 대통령 보고 안건에 포함시켰다"고 전했다.

이어 20일 뒤인 10월 6일 한.미 양국은 한국 측의 요구가 반영된 주한미군 감축 계획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여권의 한 핵심 인사는 "주한미군 감축 협상에서 정동영 장관이 어느 정도 역할을 했으며, 롤리스 부차관보의 도움이 컸다"고 주장했다.

한 외교소식통은 "정 장관이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이므로 그의 역할을 무시할 수는 없다"면서도 "그러나 이번에 국방부.외교부 등 실무 부서가 국익을 위해 끈질기게 협상한 것도 엄연한 사실이므로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선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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