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기의 비디오 정치] 룰스 오브 인게이지먼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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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인간들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서로 개입을 하면서 살아가게 마련이다.

가정에서뿐만 아니라 각종 이익단체.정당.공(公)기관.정부조직들도 서로 개입을 하면서 사회를 이루어간다.

국가끼리도 마찬가지다. 북.미회담도 북한에 개입하려는 미국과 그런 개입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는 북한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는 미묘한 줄다리기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모든 개입에는 룰(rule)이 있어야 한다. 룰이라는 말은 법이라는 말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공식적으로 법의 형태를 띠고 있지 않더라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룰이 있는 법이다.

금융감독원이 한국의 금융 상황을 감독하며 개입할 때는 명문화한 법률 이외에도 철저히 지켜야 할 룰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이 그 룰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국민정부의 도덕성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급기야 청와대 청소원까지 무슨 과장이라고 속여 잘 나가는 벤처기업에 개입해 수억원을 챙기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개입의 룰' 이라는 말이 더욱 절실히 되새겨지는 요즈음이다.

아예 개입의 룰이라는 말을 제목으로 삼고 있는 영화가 있다. '룰스 오브 인게이지먼트' 는 전설적인 걸작 '엑소시스트' 의 윌리엄 프레드킨 감독이 만든 작품으로 박스 오피스 2주 연속 1위라는 흥행을 미국에서 기록했지만 개입의 룰에 둔감한 한국 사회에서는 흥행 부진으로 끝났다.

물론 여기서 인게이지먼트(engagement)는 군사용어로 교전(交戰)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영화 전체를 놓고 볼 때는 개입(介入)이라는 용어가 더욱 적절할 것 같다.

결혼도 하지 않고 오직 군대 복무만 충실히 해온 테리 칠더스(새뮤얼 잭슨)대령이 해병대 일개 소대를 이끌고 반미(反美)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난 예멘으로 급파돼 그곳 주재 미국 대사를 안전하게 본국으로 호송하는 작전을 수행한다.

그 과정에서 예멘 시민들의 시위가 벌어지고 시위대 속에 숨은 테러단이 미 해병대에게 총을 난사해 해병대 3명이 즉사한다.

부하들이 죽는 것을 본 칠더스 대령이 "개새끼들 갈겨버려!" 라고 발포명령을 내려 예멘 사람 83명이 죽는 사태가 벌어진다.

결국 칠더스 대령은 교전법칙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군법회의에 기소당한다.

교전법칙은 첫째, 경고를 먼저 한 후 항복을 권유한다. 둘째, 치명적인 무기는 최후의 수단으로만 사용한다. 셋째, 공격을 하기 전에 시민을 대피시킨다 등이다. 치안방해.직무유기.살인행위가 칠더스 대령이 받고 있는 혐의내용이다.

그런데 이 재판에는 칠더스 대령을 희생양으로 삼아 세계와 국내 여론을 무마하려는 미국 정부의 음모가 개입돼 있다.

예멘 시위대에 섞여 미 해병대를 향해 총을 쏘아댄 테러단의 모습이 담긴 비디오 테이프를 국무부 보안위원회 고위관리가 벽난로 불에 태워 증거를 인멸해버린 것. 그야말로 개입의 룰을 완전히 어기고 직권을 남용한 것이다.

금감원 관리(張來燦 전 국장)가 벤처기업의 뇌물을 받은 것도 개입의 룰을 어긴 것이지만 수사망이 좁혀지자 자살을 함으로써 스스로 증거를 인멸해버린 것도 사실은 개입의 룰을 크게 어긴 셈이다.

누가 심리적인 압박을 주어 자살로 유도했다는 이야기들도 나돌고 있는데, 정말 그랬다면 영화에서 비디오 테이프를 태워버린 미국 국무부 관리와 다를 바 없다.

개입의 룰을 교묘하게 어긴 자들이 칠더스 대령을 개입의 룰(교전법칙)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기소해 중형(重刑)을 받도록 애를 쓰지만 결국 누가 개입의 룰을 어겼는지 드러나고 만다.

조성기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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