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2년 비록 북핵 2차위기] 2. 켈리, 평양 2박3일 때 무슨 일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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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0월 3일 오후 평양 중구역 외무성 2호 회의실. 군용기편으로 서해 직항로를 거쳐 평양에 도착한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가 방북 보따리를 풀어놓고 있었다. 북한 카운터파트는 김계관 외무성 부상이었다. 그러나 이날 대화는 켈리의 기조발언이 끝나자마자 파국 조짐을 보였다. 말미의 '폭탄 통보' 때문이었다. "미국은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과감한 접근법(Bold Approach)을 준비해 왔습니다. 이는 북한이 국제사회의 우려사항(대량살상무기 등)에 대한 행동을 바꾼다면 미국이 경제적.외교적 조치들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은 이 접근법을 추진할 수 없게 됐습니다. 우리는 최근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 핵개발 계획(HEUP)을 갖고 있다는 정보를 확보했습니다. 이는 북.미 제네바 합의와 다른 국제 협약을 어긴 것입니다. 북한은 이 비밀 핵개발 계획을 즉각적이고 가시적으로 해체해야 합니다."(훗날 켈리 회견 및 관계자 증언)

이 발언은 북측에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김계관은 이후 만난 미국 인사에게 "켈리 발언에 깜짝 놀랐다"고 털어놓는다.) 김계관은 일단 "그런 계획은 없다" "미국이 날조한 것"이라고 되받아친다. 복수의 외교소식통에 따르면 김계관은 당황하면서 화를 냈다고 한다.

1라운드의 공방이 끝난 뒤의 휴식시간. 김계관은 켈리의 발언을 득달같이 상부에 보고한다. 이어진 회담은 해보나마나였다. 서로 같은 입장만 되풀이했다. 이날 북한은 밤샘 내부 회의를 했다. 만 하루가 걸리지 않은 이 회의의 결론은 한반도 정세의 물줄기를 바꿔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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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4일 오전 만수대의사당 회의실. 이날 북측 수석대표로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이 나왔다. 북측 태도는 돌변했다. 다음은 북한의 성명, 켈리 회견, 정부 관계자 얘기를 종합한 강석주의 발언 요지. "미국은 북.미 제네바 합의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곤 미국의 위반사항을 조목조목 나열한다). 부시 행정부가 우리를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핵 선제공격 대상에 포함시킨 것은…제네바 합의를 완전히 무효화시킨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권과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핵무기는 물론 그보다 더한 것도 가지게 돼 있습니다. 미국이 불가침조약을 통해 우리에게 불가침을 확약하면 미국의 안보상 우려를 해소할 용의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강 부상은 "이런 문제를 북.미 최고위급에서 논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번에는 미국 대표단이 소스라친다. 예기치 않은 답변이었기 때문이었다. 켈리는 그해 12월 11일 우드로 윌슨 센터 강연에서 "강석주는 내가 말도 꺼내기 전에 'HEUP를 추진하고 있으며, 제네바 합의는 무효화된 것으로 간주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 나를 놀라게 했다"고 말한다.

당시 미국의 당혹감은 콘돌리자 라이스 국가안보보좌관의 10월 20일 CBS회견에서도 확인된다. "우리가 놀란 것은 HEUP 때문이 아니라 북한이 그것을 인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켈리는 전날 밝힌 원론적 입장을 되풀이하는 데 그친다. 본국의 훈령을 받지 않기로 하고 방북했기 때문이다. 그에겐 북한과의 협상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면 북한은 왜 HEUP를 인정해 사태를 벼랑 끝으로 몰고갔던 것일까. 일각에선 미국이 HEUP 증거로 원심분리기 부품의 거래 영수증을 제시했다는 얘기가 있으나 "사실과 다르다"고 정부 관계자들은 말한다. 정부 관계자 A씨는 "북한은 미국이 모든 정보를 갖고 있다는 판단 아래 정공법을 택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 방북 때의 일본인 납치 시인에 이은 2차 고백 외교의 색채가 감지된다는 것이다. 당시 정부 고위 관계자 B씨는 "강석주의 발언은 북한 국방위원회와 외무성이 김정일 위원장 입회하에 대책회의를 한 결과일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그해 11월 방북했던 돈 오버도퍼 존스홉킨스대 교수도 "북측 관리를 만나 보니 김 위원장이 개입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고 본지에 밝혔다.

다른 하나는 북한의 위기의식이다. 당시 미국의 이라크 공격 문제는 전 세계의 화두였고, 개전은 시간문제로 받아들여졌다. 북한은 "이라크 다음 타깃은 우리"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것들이 한손엔 최고위급 간 협상 카드를, 다른 손엔 핵무기 보유 카드를 들게 했을 수 있다.

강석주와의 회담 후 이번엔 미국에 비상이 걸린다. 내부회의가 이어졌다. 강석주의 발언이 HEUP를 시인한 것인지 아닌지를 가리기 위해서였다. 당시 우리말이 가능한 미국 대표단 인사는 세 사람이었다.

공식 통역인 통 킴(김동현)씨 외에 데이비드 스트로브 국무부 한국과장, 국무부 소속 여직원이다. 통 킴씨는 20여년간 국무부에서 한반도 관련 통역을 맡았고, 역대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수차례 미측의 한국어 통역을 맡은 인물이다. 부인이 한국인인 스트로브 과장도 우리말이 유창하다. 정부 관계자들은 "통역상 오류는 생각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이 회의에서 미측은 북한이 HEUP를 시인했다고 결론짓는다고 한다. 제2차 북핵 위기가 수면하에서 태동하는 순간이었다.

미국이 북한의 HEUP를 파악했던 시점은 언제일까. 뉴요커지(2003년 1월 27일자)에 따르면 중앙정보국(CIA)이 부시 대통령과 최고위급 참모에게 북한의 HEUP에 대해 보고한 것은 2002년 6월이었다. 이 보고서는 1급 비밀로 분류됐고, 배부도 극도로 제한됐다. 내용은 파키스탄과 북한 간 HEUP-미사일 거래 커넥션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그해 여름까지도 공개되지 않는다.

심지어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7월 말 브루나이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외무장관회의 때 별도로 백남순 북한 외무상과 만났지만 이 문제를 추궁하지 않았다. 그는 나중의 인터뷰에서 "북한의 HEUP가 진행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북한과 (대화를) 계속하길 원했다"고 말했다. 워싱턴 포스트지는 이와 관련, "부시 행정부는 대이라크 전쟁 준비를 훼손할 수 있기 때문에 북핵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묻어두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북한의 HEUP는 당시 열려서는 안 될 판도라의 상자였다.

북한의 HEUP에 관한 입장은 켈리 방북 이후 바뀌어 나간다. 2003년 8월의 1차 6자회담 때 김영일 외무성 부상(수석대표)은 "우리에게는 농축 우라늄보다 더한 것도 가지게 돼 있다고 말해 주었다. 우리에게는 일심단결을 비롯하여 그보다 더 강한 무기가 있다"고 말했다. 요컨대 켈리 방북 때 인정한 것은 일심단결의 정신력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2002년 10월 25일 외무성 담화에서 "핵무기는 물론 그보다 더한 것도 가지게 돼 있다는 것을 명백히 말해주었다"고 해 HEUP를 시인했다. 김영일은 이 외무성 담화에서 '핵무기는 물론'이라는 중대 구절을 빼고 입장을 분식했던 것이다. 북한의 오판을 인정한 셈이었다.

10월 5일 오후 서울 한남동 외교장관 공관. 한국에 되돌아온 켈리 일행은 방북 결과를 설명한다. "켈리는 2일 방한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임동원 대통령 외교안보통일 특보, 최성홍 외교장관 등을 차례로 예방하고 회담 결과를 설명하게 돼 있었지요. 그런데 이날 갑작스럽게 일정이 바뀌었습니다. 동시에 보자는 것이었지요. 나쁜 소식일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당시 정부 관계자 C씨의 예감은 적중한다. 사진 촬영이 끝나고 보도진이 물러나자 나온 켈리의 한마디에 정부 관계자들은 놀란다. "그들은 (HEUP를) 도전적으로 인정했습니다." 당시 고위 관계자 D씨는 "이 얘기를 들었을 때 등골이 오싹했다"고 말했다.

그날 저녁 정부중앙청사 18층 강당. 켈리는 대표단과 더불어 기자회견장에 나타났다. 미측 회견 진행자는 켈리 차관보가 짤막한 성명만 낭독하고, 질문을 받지 않는다고 고지했다. 워싱턴의 훈령에 따른 것이었다. 회견은 6분 만에 끝났고, 100여명의 내외신 기자들은 기자회견에 허탈해했다. 기자들은 켈리의 '로봇 행보'에 담긴 뜻을 읽어내지 못했다. 북핵 2차 위기가 공개돼 난리가 난 것은 그로부터 12일 뒤였다. 뜻밖의 언론 누설 때문이었다.

오영환 기자.정용수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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