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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빗장 풀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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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10여년에 걸친 불경기 이후 일본 경제는 회복세를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외양만으로 속단할 수는 없다. 경제지표 등 펀더멘털은 여전히 좋지 않다. 일본의 기욺세는 뚜렷하다. 1980년대 후반 일본에서는 '팍스 아메리카나'가 끝나고 '팍스 야포니카(Pax Japonica)'가 대신할 것이라는 주장이 유행했다. 2005년이면 미국을 제칠 것이라는 예상도 나왔다. 그러나 현재는 일본의 무력증만 보일 뿐이다.

일본이 쇠락하게 된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일본 정부와 재계는 '창조적 파괴'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 도요타나 캐논처럼 발군의 기업도 있긴 하지만 이 나라에서는 '공룡 기업'을 평생 먹여 살린다. 벤처기업이 끼어들 여지가 너무 적다. 일본 경제는 하드 디스크에는 사용하지 않는 프로그램이 가득 차 있고 '삭제'버튼은 작동되지 않는 컴퓨터 같다.

일본 경제는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이다. 자본은 물론 노동자.경영인.학자 등 인력과 아이디어 등이 다른 나라로부터 유입되지 않는다. 대학이나 싱크 탱크, 언론 등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사회의 역동적 요소로 꼽히는 비정부기구(NGO)가 일본에는 거의 없다. 일본 사회의 폐쇄성과 아이디어 결핍은 부분적으로는 세계 공용어인 영어를 못하는 데서도 기인한다. 일본의 토플(TOEFL) 실력은 겨우 북한보다 나은 수준이다.

경제력으로 보면 일본은 세계무역기구(WTO) 등에서 앞장서 활약해야 한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 개방과 다자주의 체제하의 주된 수혜자임에도 일본은 퇴행적인 중상주의 국가에 머물고 있다. 이러한 고립된 상황 때문에 일본의 위치는 혼란스럽다. 일본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 되고자 로비를 한다. 그러면서 일본 총리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식의 행동으로 제국주의의 피해자였던 아시아 국가들을 모욕한다. 총리의 행동이 부도덕한 것은 논외로 치더라도, 중국과 미국이 유엔에서 비토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 이러한 행동은 현실정치의 관점에서 어리석기 짝이 없다.

중국과의 관계는 일본에 가장 심각한 문제다. 19세기와 20세기 초 일본이 동아시아의 주축으로 떠오르면서 중국은 세번이나 일본과 관련해 끔찍한 대학살을 겪어야 했다. 1949년 공산당 집권과 냉전, 그리고 미국의 일본 우호정책 덕분에 일본은 도덕적 심판을 피해갈 수 있었을 뿐이다. 중국이 부상하고 일본이 쇠약해진 지금 이러한 오래된 의혹과 긴장, 불신이 다시 표면 위로 올라오고 있다.

일본의 전망이 우울하다는 것은 전 세계로 봤을 때 나쁜 소식이다. 일본은 세계에서 둘째가는 경제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경제 발전과 빈곤 감소 등에서 일본이 기관차 역할을 할 전망은 거의 없어 보인다. 일본의 최근 성장은 절대적으로 대(對)중국 무역 덕분이다. 중국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불과 일본의 30분의 1 수준인 나라인데 말이다.

일본의 경직되고 국수적인 태도는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유일한 해결책은 빗장을 푸는 것이다. 경제뿐 아니라 사회를, 대학을, 언론을, 싱크 탱크를, 그리고 술집과 목욕탕까지 전체를 개방해야 한다. 일본 젊은이들 다수가 개방된 사회에서 살길 원하지만 그들이 택할 수 있는 것은 이민뿐이다.

개방된 일본이란 바깥으로 눈길을 돌리는 것을 뜻한다. 영어를 좀더 잘해 아시아를 넘어 세계와 대화할 수 있는, 그래서 전쟁 범죄를 포함해 다른 나라가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어야 한다. 미국 해군이 군함을 앞세워 강제로 이 나라의 문을 연 지 150년이 흘렀다. 이제는 스스로 자신을 열어 보여야 한다.

장 피에르 레만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연 교수
정리=기선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