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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문창극 칼럼

문지기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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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민주제도는 입법부의 독립을 보장한다. 그래서 의원 한 사람 한 사람을 헌법기관이라 부른다. 그만큼 자유와 독립을 누린다는 말이다. 자유의 본질은 무엇인가? 입법부의 자유가 있다 하여 의원 개인이 무엇이든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입법부의 독립이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입법권이 외부의 압력이나 위협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행사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 자유가 회의장에 망치와 톱을 들고 나타나거나, 발길질에 공중 부양을 하는 자유는 아닌 것이다. 그 자유에는 의원으로서의 책임과 품위가 수반되어야 한다. 의원들에게 이런 자세를 요구할 책임은 국회 자신에 있다. 만일 진정으로 입법부의 독립을 원했다면 국회 폭력 문제를 애당초 검찰로 끌고 가지 말았어야 했다. 검찰 고발 자체가 스스로 입법부의 독립을 포기한 것이다. 국회 안에서 윤리위를 열든, 특위를 구성하든 자신의 문제를 자신들이 해결했어야 한다. 그것은 국회의장의 의무요, 이것이 국회의 게이트 키핑이다.

사법부의 독립도 마찬가지다. ‘주저앉은 소를 광우병 때문이라고 보도한 일은 잘못된 것’이라고 민사고법에서는 정정판결을 내렸고 이에 따라 MBC도 사과 방송을 했다. 이를 형사지법 판사가 무죄 판결을 내렸다. 그렇다면 판사의 마음에 따라 주저앉은 소의 진실이 달라지는 것인가. 젊은 지법 판사는 고법의 합의부 선배 판사들의 판단을 고려하지 않았다. 이것이 법관의 독립인가? 지난 정권 이후의 사법부는 이런 ‘아이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이 법원 행정에도 영향을 끼치고 선배 판사들은 ‘아이들’ 판사의 눈치를 보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대법원장까지 여기에 가세한 형편으로 보인다. 이번 일은 사법부 역시 게이트 키핑 장치가 무너졌기 때문에 일어났다.

최근 문제가 된 일련의 사건들은 모두 독립과 자유를 보장받는 기관과 관련되어 벌어졌다. 광우병은 언론 자유, 국회 폭력은 입법부의 독립, 그에 대한 재판은 사법부의 독립과 관련된 사건들이다. 사건의 관련자들은 바로 그 독립과 자유를 주장하기 때문에 나름의 명분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한번 더 깊게 생각해보면 이 사건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이들 간에 개인적인 연결은 없을지라도 이들을 묶는 끈이 있어 보인다. 따라서 이들이 독립과 자유를 외치지만 기실 그들은 하나의 목표를 향해 묶여 있다. 나는 그 뿌리가 이념이라고 본다. 겉으로는 따로 선 나무들로 보이지만 뿌리로는 모두 연결되어 있는 것, 즉 삼권분립이 아니라 이념을 위해 삼권뿐 아니라 언론까지도 통일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과거 독재자의 권력 때문에 삼권분립이 위기를 겪었다면 이제는 특정 이념을 실현시키기 위해 삼권분립을 위기로 몰아넣는 것이다.

제도 자체는 생명력이 없다. 삼권분립을 제도로 보장한다 해도 이를 운영하는 주체는 사람이다. 지금의 위기는 바로 법이 보장하는 자유와 독립을 그 제도를 운영하는 일부 ‘사람’들이 교묘하게 이용하기 때문이다. 이승만 시절 사법부가 독립을 지킬 수 있었던 힘은 바로 그 수장인 가인 김병로에게서 나왔다. 그가 내세운 것은 언제나 헌법이었다. 대통령 이승만은 그것이 못마땅해 경무대에 올라온 법무장관에게 “요즘 ‘헌법’ 잘 계시느냐”고 빈정댔다 한다. 가인은 헌법의 문지기였다. 지금도 우리 입법·사법부에 그와 같은 수장이 지키고 있다면 요즘 같은 일들은 벌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중요한 것이다. 독립과 자유가 요구되는 자리에 이를 지킬 수 있는 문지기를 세우는 것, 그것이 바로 성숙한 민주주의의 요체이다.

문창극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