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혼미, 혼전 거듭한 미국 대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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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투표는 끝났지만 당선자가 가려지지 않는 사상 초유의 상황이 어제 치러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발생했다.

그 바람에 성급히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후보의 당선을 보도했던 미국의 모든 방송이 오보를 내고 다른 나라 국가정상이 부시 후보에게 축전을 보냈다가 취소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오죽했으면 민주당의 앨 고어 후보가 부시 후보에게 패배를 인정하는 전화를 했다가 취소하는 일까지 생겼겠는가.

잘 알려진 대로 대통령을 직접 뽑는 게 아니라 선거인단을 뽑는 미 대선은 주별로 한표라도 득표수가 많은 후보가 그 주의 선거인단 전체를 가져가는 '승자독식' 의 방식에 따라 치러진다.

이번 선거에서 최대의 격전지인 플로리다주에서 부시 후보와 고어 후보의 표차가 주법에 정해진 재검표 요건인 0.5% 범위에 들게 돼 선거가 끝났어도 바로 승패를 가릴 수 없는 상황이 빚어진 것이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재검표 상황이 보여주듯 이번 선거는 말그대로 박빙의 대접전이었던 셈이다.

우리는 이번 미 대선을 지켜보면서 미국식 민주주의를 새삼스레 다시 생각하게 된다.

부시의 당선을 서둘러 보도한 언론의 실수는 속보경쟁이 빚은 '참사' 로 보이지만 미 언론은 곧바로 잘못을 인정했고, 두 후보 진영이나 국민 모두 이를 받아들이고 최종 결과를 차분하게 기다렸다.

바로 이같은 성숙한 시민의식이 미국식 민주주의를 작동케 하는 요체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이번 선거는 사상 최장기 호황이라는 경제적 번영의 지속과 민주당 8년 집권에 대한 변화의 욕구 사이에서 미 국민이 얼마나 고심했는지를 보여주면서도 한편으로 쟁점대결이 두드러진 선거였다고 볼 수 있다.

대외정책이 뚜렷한 이슈로 부각되지 않는 상황에서 두 후보는 막판까지 감세.교육.의료.재정흑자 등 국내 쟁점을 놓고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언제나 바람몰이에 목을 거는 우리 대선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현재로서는 누가 최종적으로 당선될지 예단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플로리다주 투표결과가 재검표로 굳어져 부시 후보가 당선된다면 그는 상.하원을 장악한 가운데 국정을 요리할 수 있는 강력한 대통령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 경우 선거공약에서 밝힌 대로 대외정책에서 적지 않은 변화가 예상되고 있다. 한반도 정책에서도 채찍보다 당근에 의존하는 대북(對北)포용정책의 변화 가능성이 점쳐지기도 한다.

하지만 현 상황에서 부시로서도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비록 속도는 다소 둔화될지 모르지만 '페리 프로세스' 에 따른 대북 접근정책의 큰 줄기가 흔들리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고어가 당선될 경우 화해.협력에 기초한 우리 정부의 대북정책은 더욱 탄력을 받겠지만 상.하원을 장악한 공화당의 강한 견제가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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