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와 춤을②] 사탕 한 개와 거위 요리를 바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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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징(魏徵, 580~643)은 당태종(唐太宗, 599~649)에게 과감하게 간언을 올리면서도 황제의 보복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주인공으로 유명하다. 사실 위징은 총명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지 않았다. 그의 간언들은 거의 모두 어떤 사안의 방식과 방법, 때를 주의하라는 내용 정도였다.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을 모두 들쳐봐도 위징이 ‘문관은 간언하다 죽고, 무관은 전쟁터에서 죽는다(文死諫, 武死戰)'는 식으로 황제에게 목숨을 잃은 명(明)나라 관리들처럼 관을 메고 유서를 품에 넣고 황궁에 들어가 울고 소리치고 자살하는 식의 행동을 한 사례는 보이지 않는다.

사실은 이렇다. 당나라에는 일찌기 고조 이연의 조카 이훤(李諼)의 반란이 있었다. 반란을 진압한 뒤 당태종은 이훤의 애첩을 자신이 취했다. 하루는 위징이 조정회의를 마친 후 황궁의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는데 당태종이 한 여인을 가리키며 “네가 한번 보아라. 이 여인네는 본래 남편이 있었으나 이훤이 마침 그 지아비를 죽이고 이 여인을 겁탈했다. 쯧쯧, 가련하구나, 네가 보기에도 생김새가 반반하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위징같은 충신이 마땅히 정색을 하고 진지하게 당태종에게 그 여인네를 풀어주라 권했으리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위징은 우선 황상을 따라 그 여인의 자태를 칭찬한 뒤에 당태종의 기분이 좋아진 것을 확인한 뒤에 비로소 가볍게 한마디 했다. “황상은 이훤이 한 짓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당태종은 체면을 가장 중시한 사람 아닌가. 그가 이훤이 한 짓이 말이 된다고 했을까? 당연히 아니다. 당태종은 이훤을 죽이고 그의 첩을 취했다. 이는 그가 이훤과 같은 부류가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위징은 두세마디 말만 했을 뿐이다. 당태종 자신이 그 여인네를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위징은 목적을 달성했다. 시기나 미움을 받을 일을 하지 않았다. 그 여인을 풀어준 것은 당태종이다. 황제 스스로 영단을 내린 것이다. 결코 위징이 권했기 때문은 아니다.

무릇 인간은 모두 탐욕과 단점을 갖고 있다. 황제도 당연히 예외가 아니다. 황제 주위의 대신이 황제에게 간언하는 것은 그들의 본분이다. 단, 어떻게 간언하느냐는 심오한 학문의 범주에 속한다. 황제는 통상 스스로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체면을 중시하고, 잘못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다. 일단 조금이라도 기분이 틀어지면 충고는 먹히지 않을 뿐더러 잘못하면 화를 당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우선 그의 말을 따른 연후에 다른 방법을 생각한 뒤 애둘러 말하는 것이다. 그가 스스로 바로잡게 해야 한다. 이를 일컬어 ‘사탕 하나를 주고 거위 구이와 바꾼다(給顆糖果,換只燒鵝;급과당과 환지소아)’고 말한다. 이것이 가장 타산이 맞는 묘수다.

사탕을 거위요리와 바꾸는 또 다른 방법은 커다란 목표를 위해 황제의 작은 단점은 적당히 눈감아 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제환공(齊 桓公)은 단점이 많았다. 여색을 좋아하고 사냥을 즐겼다. 자기 스스로도 이를 부끄럽게 여겼다.하지만 관중(管仲)은 오히려 그에게 한사코 “괜찮습니다. 맘대로 하십시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맘대로 하는 것에는 전제조건이 있었다. 만일 환공이 인재를 선발함에 그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게 하며, 단지 아첨만 일삼는 무리들을 가까이 하지 말고, 고위 관리 가운데에는 모래에 흙을 섞듯이 항시 새 사람을 넣도록 했다. 환공이 사냥을 아무리 좋아하건 작은 부인을 많이 두건 말건 관여치 않았다.
여기서 사냥과 첩은 바로 ‘사탕’이었다. 인재를 등용하는 권한이 바로 ‘거위 구이’에 해당했다. 관중이 우선 “맘대로 하십시요”라는 말로 제환공의 환심을 산 뒤에 간부 임면권 문제를 거론한 것이다. 결과는 식은 죽먹기였다. 이를 일컬어 ‘작은 일은 맘대로 하되 큰 일은 맘대로 못하다’라고 한다. 이처럼 맘대로 하는 소소한 일들이 없으면 큰 일도 맘대로 못하려니 생각하게 되어,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걱정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처세술은 우선 황제의 사람됨을 살핀 뒤에 사용해야 한다. 당태종과 제환공은 모두 어리석은 바보가 아니었다. 모두 원대한 포부를 갖고 있었다. 사탕을 주고 거위 요리와 바꾼 것은 그들이 한편으로 자존심을 세우면서, 한편으로 마음속에 분명이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황제를 만났을 경우에도 이렇게 했다간 경을 치기 쉽다.
당나라 중엽 덕종(德宗, 742~805)은 욕심 많고 작은 이익을 쫓는 사람이었다. 항상 국가 재정수입과 군비를 황실에서 전용했다. 대신 이비(李泌, 722~789)는 군사비와 정부 지출을 보호하기 위해 적당한 공금을 전용해 덕종의 비자금으로 바쳤다. 황제가 비자금만 손대고 국가 재정은 다시 넘보지 않기를 바란 것이다. 하지만 덕종은 여전했다. 수시로 임시 영수증을 만들어 나랏돈을 직접 자신의 비자금으로 사용했다. 이 때문에 이비는 오랫동안 답답하고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덕종의 어리석음은 당나라 중에서도 유명하다. 이비는 황제가 어릴때부터 성장하는 것을 지켜봤으니 그 천성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같이 ‘사탕과 거위요리를 바꾸겠다’는 생각이었으나 결과적으로 거위요리는 보지도 못하고 사탕 한 접시만 황상의 간식으로 바친 셈이 돼 버렸다. 이는 ‘황제 다루는 방법’을 잘 융통하지 못한 결과다. 자치통감을 쓴 사마광이 붓을 내려놓고 장탄식을 한 것도 바로 같은 이유다.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xiao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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