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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통령 ‘조건없는 김정일 만남’ BBC 인터뷰 진실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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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이명박 대통령이 연내 남북정상회담을 언급했다. 당국자들은 연내 개최 가능성은 부인하지 않았지만, 현 단계 진전은 없다고 했다. 다음은 기사 전문.

이명박 대통령이 정상회담 파장을 몰고 30일 오전 서울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인도 정상회담과 스위스 다보스포럼 등 6박 7일 일정에서 성과를 거뒀지만 남북 정상회담 이슈에 묻혔다. 이 대통령이 B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남북 정상회담 연내 가능성’ 등을 언급하며 정상회담 논의가 농익은 상황이란 뉘앙스를 풍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내용을 청와대 김은혜 대변인이 ‘편집해’ 기자들에게 전달한 게 드러났다. 논란이 확산되자 김 대변인은 이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했다. 갑작스레 등장한 정상회담 가능성, 이를 둘러싼 남북 간 논의의 실체, 김 대변인 거취 문제까지 상황이 복잡하게 얽혀버렸다.

이 대통령은 28일 BBC 인터뷰에서 기존 입장보다 훨씬 진일보한 언급을 했다. “나는 김정일 위원장을 만날 준비가 항상 돼 있다. 단지 우리가 유익한 대화를 해야 되고 북한 핵 문제에 대해 충분한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양측 간 화해와 협력을 위해 열린 마음으로 사전에 만나는 데 대한 조건이 없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 조만간이라며 이렇게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지만 아마 연내에 만날 수 있을 것 같다고 본다.”

CNN선 "북, 핵포기 답할 시기 다가와"
이 대통령은 30일 방송된 CNN과의 인터뷰에서도 “우리는 그랜드 바긴(북핵 일괄타결) 방안을 제시했다”면서 “결국 북한은 마지막으로 핵을 포기할 것인지 아닌지를 답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북한 내부 사정도 있기 때문에 곧바로 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그랜드 바긴에 대해 (북한과) 협의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11월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이 대통령은 “북핵 포기에 도움이 된다면, 인도적 입장에서 국군포로·납치자 문제를 서로 이야기하며 풀 수 있다면 (김정일 위원장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정상회담의 개최 조건을 밝힌 셈이다. 또 “그런 조건이라면 이번 한 번만큼은 굳이 서울이 아니어도 된다”고 했다. 지난해 8월과 10월 임태희 노동부 장관과 김양건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의 싱가포르 비밀 접촉이 성과 없이 끝나게 만든 3대 조건 가운데 ‘장소’ 문제를 푼 것이다. 우리 정부는 4차 정상회담을 서울서 한다는 보장이 있으면 3차 정상회담을 평양서 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 대통령은 시점도 “연내”라고 밝히고 “조건도 없어야 한다”고 했다. 발언대로라면 정상회담 조건을 거의 푼 셈이다.

이에 대해 이동관 청와대 홍보수석은 “원칙에 맞고 여건과 조건이 충족된다면 언제든 남북 정상회담을 할 수 있다는 원론적 입장을 강조한 것이다. 만남을 위한 만남, 정치적·전술적 국면 전환을 위한 회담은 않겠다는 게 우리 정부의 일관된 기조이자 대통령의 철학”이라며 진화에 나섰다. 그는 “현재 구체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안다”고 말했다.30일 다른 외교 안보 관계자들도 한결 같은 취지로 언급했다. 청와대 핵심 당국자는 “임박했다고 할 구체적 징후가 있는 것은 없다”며 “그런 단계라면 한국 대통령이 외신에 먼저 그렇게 얘기하겠느냐”고 말했다. “전제 조건도 변한 것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 남북 채널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지난해 10월 임 노동부 장관과 김 통전 부장 접촉 이후 의미를 둘 만한 접촉은 없다”는 게 당국자들의 답변이다. 하지만 접촉 및 교감 자체를 부정하진 않았다. 남북을 오가는 비정부기구(NGO) 인사들과 북측의 접촉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민화협 의장인 김덕룡 대통령 특보와 재야권 목사가 메신저로 뛰고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김만복 선례, 국정원 나설 일 아니다”
원세훈 국정원장이 움직인다는 설도 최근 불거졌었다. 지난 27일 북한이 해안포를 발사한 첫날, 외교안보 긴급 조정회의에 원 원장이 불참하면서 추측은 확산됐다. 국정원 개입설과 관련, 정부 핵심 당국자는 “지난 정권 말 김만복 원장이 비밀리에 정상회담을 추진하며 논란이 빚어진 선례가 있지 않으냐, ‘원’(국정원)이 나설 일은 아니다”고 했다.

다른 청와대 관계자는 “우리 측이 제기한 핵심 의제를 이 대통령이 정상회담 테이블에서 내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 대통령이 BBC 인터뷰에서 언급한 ‘사전에 만나는 데 조건이 없어야 한다’는 말은 조건 없이 만나겠다는 의미가 아니고 북한이 조건 없이 정상회담에 임해야 한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북한이 전처럼 거액의 현금이나 10·4 합의 같은 ‘약속어음’을 사전에 요구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의미”라고 했다.

이 대통령의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의지는 강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부 고위 소식통은 “BBC 발언은 이 대통령이 정치인과 기업가의 경험으로 연내에 가능할 것이란 감(感)과 기대감, 자신감에서 적극적으로 입장을 피력하면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과거와 다른 방식이 돼야 한다는 생각도 분명하다고 한다. 여권 관계자는 “두 차례 정상회담을 하고도 핵 문제로 제자리로 돌아가는 회담은 하지 않겠다. 대신 핵 문제 진전을 이루면서 전과는 다른 본질적인 남북 관계 변화를 이끌어내겠다는 의지도 있고 자신감도 있다”고 전했다. 원칙이 확고하다는 얘기다. 일각에선 이 대통령의 언급이 북한이 해안포를 발사하며 도발을 거듭하는 상황에서 북을 달래며 관리하려는 심리전일 수도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공은 북한에 가 있다”는 현인택 통일부 장관의 언급처럼 문제는 북의 입장이다. 지난해 싱가포르 접촉에서 남북은 조건을 제시했다. 양측의 ‘호가’는 서로 높았고, 결국 현재까지 이렇다 할 진전은 없다. 남북 모두에 ‘장소’보다 ‘의제’가 결렬의 핵심 원인이었다. 노무현 정부도 핵 문제를 2007년 10월 정상회담 의제로 올리려 했지만 북한의 거부로 경제협력 사안만 합의했다. 정부 고위 소식통은 “그해 북·미가 10·3 합의를 서둘러 낸 것은 남북 정상회담 의제에서 자유로워지는 상황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고 했다. 연내 정상회담 가능성을 완강히 부인하는 당국자는 없다. 북한이 우리 측 의제를 받아들인다 해도 시기가 당장 수개월 내는 아니라고 본다. 북한이 6자회담에 복귀, 핵 협상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소득을 얻어낸 뒤라야 남한과의 테이블에 앉는다는 것이다.

다른 관계자는 청와대 보도자료가 BBC 인터뷰 내용과 다르게 작성되는 과정에서 언론이 대통령 언급을 과대 해석하는 상황도 생겼다고 말했다. 김 대변인은 “대통령이 상당히 피곤한 상황에서 인터뷰를 했고 매끄럽지 못하게 진행됐다”며 “여파가 클 수 있어 대통령께 발언의 진정한 의미를 물었고 대통령의 설명을 토대로 보도자료를 냈다”고 해명했었다. 하지만 내용은 차치해도 대통령의 발언을 편집·왜곡시켜 기자들에게 전달한 점 그리고 대변인이 대통령의 건강 상황을 거리낌 없이 말한 점 때문에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와 관련, 청와대는 김 대변인이 대통령에게 낸 ‘사의’가 비공식적이고, 일을 열심히 하다 실수한 만큼 거취를 바꾸진 않는다는 입장을 정리했다. 청와대 홍보수석실 측 인사는 “31일 춘추관에서 김 대변인이 기자들에게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며 이해를 구할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비서진이 김 대변인과 관련된 경위를 설명하자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고 한 관계자가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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