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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 시절 ‘피가로의 결혼’ 본 뒤 오페라 유령에 홀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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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호 14면

조윤선 의원은 “한나라당이 폭넓은 지지를 받으려면 국민이 미워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동연 기자

지난 24일 저녁 조윤선 한나라당 대변인은 다시 마이크 앞에 섰다. “대변인직을 그만둔다”며 사의를 표한 뒤 2주일 만이었다. 무대는 여의도 당사가 아니었다.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이었다. 의상도 달랐다. 단정한 정장 대신 어깨를 드러낸 검은색 드레스 차림이었다.한국 전통 음악의 세계화를 모색한다는 취지로 마련된 ‘다울 음악회’. 그는 1부 오페라 콘서트의 사회자 겸 해설자로 무대에 섰다.

오페라 해설자로 무대에 선 조윤선 의원

생상의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의 아리아 가 공연되기 직전 그의 잔잔한 해설이 마이크를 타고 흘렀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삼손과 데릴라는 다 아시죠?…삼손은 데릴라가 비밀을 캐려는 이유를 알면서도 팜므파탈 데릴라의 유혹에 넘어갑니다. 삼손에게 데릴라는 이렇게 투정을 부립니다. ‘죽음을 몰고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도 당신을 향해 날아가는 제 자신보다 빠르지 못합니다.’…데릴라의 저항할 수 없는 매력에 삼손은 데릴라에게 자신의 비밀의 근원을 알려줍니다.”

그는 이 밖에도 비제의 ‘카르멘’,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등 일곱 작품을 해설했다. 조 의원과 오페라의 만남은 낯설게 보일수도 있다. 그가 외교학(서울대)을 전공한 변호사 출신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날 콘서트에서 그는 오페라 애호가를 넘어서는 실력을 선보였다. 이날 음악회는 지휘자 서희태씨가 기획했다.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음악감독을 맡았던 인물이다. 조 의원은 “서 지휘자가 지휘하는 음악회에 갔다가 우리 가락을 오케스트라 편곡으로 연주하면 전 세계에 한국을 보여주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데 공감해 대번에 콘서트 사회를 수락했다”고 한다. 1부 공연이 끝난 뒤 무대 뒤에서 음악 애호가 조윤선을 만났다.

-어떻게 공연에 참여했나요.
“외국인들이 전통 악기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우리 음악을 알리는 데 한계가 있어요. 올해는 주요 20개국(G20) 회의가 열리니까 전 세계에 한국을 보여줄 기회가 많을 텐데 우리 가락을 오케스트라 편곡으로 연주하면 다가가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무대에 섰습니다.”

오페라 해설자로 변신한 조윤선 의원.

-오늘 해설한 작품은 조 의원이 좋아하는 곡인가요.
“다 좋아하죠. 간혹 어떤 작품을 좋아하느냐고 묻는데 제일 답하기 어려워요. 책에도 썼지만 지금 듣고 있는 작품이 가장 좋거든요.”

-정치인이 된 후 문화생활도 달라졌을 것 같은데요.
“무슨 공연이 있는지도 모르고 동호회 활동도 쉬고 있어요. 대신 해외 출장을 가면 미술관장이나 오페라 단장을 만나기도 해요. 그럴 때 공연을 보고 문화 교류에 대해 얘기를 하죠. 지난해 8월에 호주 정부 초청으로 한 달간 호주를 방문했을 때 문화계 인사를 만났어요. 호주의 오페라단 단장과 우리 국립오페라단 단장도 소개시켜줬어요. 내년이 양국 수교 60주년이라 행사가 많은데 같이 작품을 올려도 좋을 테니 교류하도록 연결해 드린 거죠.”

-의정 활동엔 도움이 되나요
“문화 예술도 결국 자본이잖아요. 프랑스는 미테랑 전 대통령 시절에 문화산업 인프라를 잘 만들어서 지금도 그걸로 먹고 살아요. 독립 재정으로 오르세 미술관 같은 문화 인프라를 갖췄잖아요. 관광만 해도 그래요. 어느 나라를 찾아갈 땐 볼거리나 할 거리가 있어야 해요. 일본 벳푸 페스티벌처럼 작지만 알찬 음악제가 좋은 예죠. 영국에도 글라인드 본이라는 작은 도시가 있는데 축제를 보려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찾는지 몰라요. 우리나라야말로 건물보다는 콘텐트가 필요한데 아직은 외형에 치우친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정책 결정자들의 철학이 참 중요하죠. 문화가 국내총생산(GDP)의 큰 부분이 될 수 있으니까요.”

-그런 문제의식을 문화정책으로 이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
“이제 공부를 하려고요. 국회의원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실현해야죠. 관심 있는 건 문화를 나누는 허브를 만드는 거예요. ‘사랑의 바이올린’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바이올린을 주고 선생님이 무료로 가르치는 거죠. 7년 만에 400명을 가르쳤대요. 이런 것이 잘 되려면 후원 기업과 가르치는 예술가와 아이들을 잘 연결해야 해요. 여러 단체가 비슷한 활동을 하고 있는데, 진짜 잘하는 곳을 발굴해서 집중적으로 키우는 게 중요하죠.”

그의 오페라에 대한 관심은 2000년 뉴욕 컬럼비아대 유학 시절 생겨났다. 틈틈이 메트로폴리탄을 찾던 어느 날 ‘피가로의 결혼’을 보는데 “2차원이던 오페라가 3차원으로 다가왔다”고 했다. “마법처럼 (오페라가) 끌어당겼다”는 그는 2003년 동호회 ‘라 돌체 비타’를 만들었고 준전문가급 오페라 애호가가 됐다.

2007년에는 월간 ‘객석’에 2년간 기고한 칼럼을 묶어 『미술관에서 오페라를 만나다』라는 책을 냈다. 최근엔 국제교류재단의 국제음악회 자문위원에 위촉됐다.조 의원은 2002년 대선 때 남경필 의원과 함께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선거대책위 공동 대변인으로 정치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대선 패배 이후 법조계로 돌아갔다. 2007년 씨티은행 법무본부장 겸 부행장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 ‘외도’는 다시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듬해 3월 한나라당 대변인이 됐고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했다. 지난 11일 대변인직에서 물러난 그는 ‘한나라당 최장수 대변인(1년 10개월)’이란 기록을 세웠다. 28일 국회의원에서 다시 그를 만났다.

-변호사에서 왜 다시 돌아왔나요.
“대선이 끝나고 17대 총선에 나가라는 제의를 받았어요. 공천을 주겠다고도 했는데 그땐 국회의원 하기엔 어리다고 생각했어요. 곱게 로펌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일해서 경험도 짧았고요. 변호사로 일도 더 하고 싶었죠. 그런데 은행에서 일하면서 입법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낀 거죠. 이명박 대통령 취임 초에 각종 규제가 철폐되는 걸 보면서 ‘아, 뭔가 발전하고 있구나. 이런 변화에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어요. 나이도 4살 더 먹고 회사에서 조직 관리도 해봤으니 (국회의원 되기) 이른 건 아닌 것 같아서 다시 시작했어요.”

-정당에서 여성 대변인 시대를 열었고, 한나라당 최장수 대변인 기록도 세웠습니다.
“2002년엔 대변인 했다고 할 수도 없어요. 대선이란 특수 상황에서 100일 동안 주로 후보에 대한 공방을 했죠. 2008년에는 총선 3주 전에 대변인이 됐어요. 총선 체제라 일도 많고 정권이 바뀌면서 조직과 사람도 바뀌고 엇박자가 났어요. 그러면서 경험 부족이란 비판도 받았어요. 그 와중에 광우병 파동, 촛불 시위가 이어졌지요… 담금질도 세게 당했죠.”

-촛불 시위 때가 어땠나요.
“소통의 벽을 느꼈어요. 왜 미국산 쇠고기가 생각만큼 걱정할 필요가 없는지 설명해야 하는데 진실을 설명하다 보면 문장이 길어져요. 거짓을 선동하는 데에는 한마디면 되는데. 구호로 진실을 설명할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죠.”

-‘전투력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있었죠.
“논평이 약하다는 말이 많았어요. 하지만 국민이 정치를 멀리하는 건 말 때문이란 걸 2008년 8월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에 갔을 때 확신했어요. 씨티은행 본사 상사가 연설 담당 총괄 책임자였는데 매일 15명의 연설문을 받아서 검토하는데 두 가지만 한대요. 오바마 후보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거나 민주당 지지자만을 향한 강성 발언을 완화하는 거죠. 부동층을 잡아야 선거에서 이기는데 지지자 기분만 좋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한나라당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지역구 출마를 염두에 두고 있나요.
“비례대표는 한계가 많아요. 정치라는 게 사람들과 부대끼고 지역 유권자들을 위한 사업도 하면서 보람을 느껴야 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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