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와 10시간] 송혜교 "슬픈 연기… 많이 배웠어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8면

# 7일 마지막회 방영

‘가을 동화’의 촬영장은 뭔가 다르다.윤석호 PD의 나즈막한 “큐”소리에 이어지는 건 대사가 아니다. 침묵이다. 조명을 든 이들,카메라를 들이대는 이들, 모니터 앞에서 연기자를 지켜보는 PD 조차 침을 꿀꺽 삼키며 숨을 죽인다.

그러고도 한참 지나서야 흐느끼는 은서의 대사. “오빠,나는 나무가 될거야….한번 뿌리내리면 움직이지 않는…, 나무가 될거야. 그래서 다시는…, 누구하고도 헤어지지 않을거야.”전해오는 건 대사만이 아니다.

언어 뒤에 숨겨진 애절함과 미처 표현 못한 가슴 떨림이 대사와 대사 사이, 침묵의 공간에서 피어난다.고통마저 동화가 되는 드라마. ‘가을동화’의 한가운데 은서가 서 있다. 그 은서를 연기하는 송혜교(18)를 만났다.

# 내 안의 은서

지난 1일 KBS 수원 제작센터에 마련된 병실 세트장. 송혜교는 ‘가을동화’의 주제곡 ‘로망스;를 들으며 뚫어지게 대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날 아침에서야 마지막회 대본이 나왔기 때문이다.쫓기는 일정이었다.

“폐교 한귀퉁이에서의 새우잠,대관령 목장에서 벌벌 떨며 먹었던 식은 김밥, 대본 연습과 촬영으로 6일 동안 서너시간 밖에 못 잤던 기억. ‘가을동화’는 제 평생 못잊을 거예요.”

동화 속 주인공이 된 느낌은 어떨까. “어려서부터 만화‘캔디’를 좋아했어요. 그런 역할을 꼭 해보고 싶었죠.은서도 캔디랑 비슷해요.”비극적인 운명을 타고 났지만 언제나 표정은 밝다는 뜻이다.

“대사를 할 때도 그래요.굉장히 슬픈 대사인데도 은서는 웃으면서 말해요. 물론 보는 사람의 마음은 찢어지죠.예를 들면 준서 오빠에게 ‘너의 죄를 사하노라’라고 장난치듯이 말하는 대목이 있어요.사실은 눈물나는 대사잖아요.”

실제 성격도 극중 은서랑 비슷하다.“눈물 많은 것만 빼곤 똑같애요.” 그런데 눈물이 글썽거린다.이유를 물었다.“대본 때문에요. 마지막이 너무 슬퍼요.”

‘가을동화’홈페이지에 수없이 올라오는 ‘은서를 살려달라’는 시청자들의 바람을 브라운관 밖의‘은서’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처음부터 슬픈 드라마였잖아요.그대로 가는게 좋아요.”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던지는 말. “그래야 드라마가 더 아프겠죠.”

#은서 밖의 나

송혜교의 표정은 한마디로‘생글생글’이다. 웃을 때면 까만 눈이 더 까매진다.‘가을동화’의 촬영 시간은 다른 드라마의 몇배다. 제작진도 쉽게 지친다. 때문에 송혜교의 쾌활함은‘비타민’이다.

사진을 찍기 위해 옷을 갈아 입었다.보라색 니트에 체크 무늬의 롱스커트.“요즘 동대문에선 니트 상의에 체크무늬 롱스커트의‘은서 패션’이 유행이래요. 너무 신기해요. 제가 입은 옷이 유행한다는 게.”

사진 기자가 포즈를 요구했다.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사이를 걸어오라는 주문이었다.순간적인 변화가 놀라웠다. 눈에 깃든 생글거림이 금세 사라졌다.아래로 내리깐 눈이 서글펐다. 영락없는 은서의 모습이었다.

아하.그제서야 이해가 갔다. 오랫동안 ‘순풍 산부인과’에서 연기하며 얻게 된 시트콤의 이미지.그것을 순식간에 깨버리고 싶었던 것 같다.

송혜교는 감수성이 풍부하다.그 자신이 만화 속 주인공 같기도 했다.“초등학교부터 순정 만화를 무청 좋아했어요. 원수연 작가의 ‘풀하우스’는 깜빡 넘어갈 정도니까요.현실보다 아름답고,현실보다 슬프잖아요.”

#가을같은 동화,동화같은 가을

서울에서 여섯 시간을 달려 도착한 강원도 고성. 2일 오후 5시쯤,해질 무렵의 화진포 바닷가.극중 은서의 마지막 장면을 촬영 중이었다. 푸르다못해 시린 하늘은 모두 죽음을 암시했다.준서(송승헌)가 은서를 업고 백사장을 걷고 있었다.

둘의 마지막 대화. “오빠,얘기해줘.오 빠 얘기 들으면서 잠자게. 내일은…,뭐 할껀데”(은서),

“니 생각하고 니 사진도 정리하고…,은서 자니?”(준서),

“응(은서)”.

잠시 후 은서의 손이 힘없이 미끄러져내렸다. 알면서도 준서는 얘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끝없이 백사장을 걸었다.

촬영을 마친 송혜교는 다소 아쉬운 표정이었다. “서해안이었으면 노을이 있어 좋을텐데”라고 말했다. 마지막 장면보다 드라마에 대한 아쉬움이 더 큰 모양이다.

옆에 있던 윤석호 PD가 슬쩍 달랬다. “바다를 부감으로 텅 빈 이미지와 쓸쓸한 느낌을 담을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얘기였다.

불쑥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한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이야기를 꺼내는 송혜교. “연기자들은 한번씩은 비련의 여주인공을 꿈꾸죠. 목숨까지 거는 사랑요.전 어린 나이에 경험할 수 있어 운이 좋았어요. 연기의 폭도 꽤나 넓어진 느낌이구요.”

백성호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