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말꼬리 잡아 상봉사업 중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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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북한 조선적십자회는 어제 장충식(張忠植)대한적십자사 총재가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을 문제삼아 "우리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모독" 이라며 총재직 경질을 요구하고 나섰다.

張총재가 책임자로 있는 한 "당면한 흩어진 가족.친척 방문단 교환과 북남 적십자 회담을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 이라는 강경한 주장을 평양방송을 통해 밝혔다.

남북 화해시대를 맞아 적어도 북한측과 빈번히 자리를 마주하는 책임자급이라면 쓸 데 없이 상대를 자극하는 언행은 삼가는 게 바람직한 자세다. 이는 북한측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張총재의 인터뷰는 전체적으로 북한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이해와 아량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남과 북의 톱니바퀴가 맞지 않는 것이 현실이며, 북측의 태도변화도 중요하지만 우리 마음 가짐의 변화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는 게 그의 주된 논지다.

몇몇 대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서 "민족의 이름으로 죄과를 계산하지 않을 수 없다" "상대하지 않겠다" 고 극언을 해대는 것은 공연한 협박에 다름 아니다.

張총재 본인은 어제 인터뷰 기사가 다소 과장된 부분이 있다는 취지로 해명까지 하지 않았는가.

특히 이산가족 상봉은 단순히 양측 적십자 단체 차원을 넘어 남북 정상회담과 장관급 회담 등에서 그동안 여러 차례 다짐한 민족적 과업이다.

상대의 몇마디 말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문제삼아 사업 중단까지 거론하는 것은 다른 의도가 있기 때문으로 비춰지기에 충분하다.

월간지에 난 기사는 샅샅이 찾아 뒤늦게 문제삼으면서 2차 상봉단 교환이 자기들 탓으로 늦어진 것에 대해 제대로 해명조차 하지 않는 것을 우리 국민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북한은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이번 사태가 1989년 2차 고향방문단 교환이 북측의 혁명가극 공연제의로 무산된 불행한 전철을 따르지 않기 바란다.

안그래도 북한 외무성이 지난달 말 한.미 독수리훈련을 문제삼으면서 "92년의 남북합의서 이행을 위한 회담들도 합동군사연습에 의해 깨어져 나갔다" 고 주장한 데 대해 '판깨기 명분 축적용' 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상황이다.

남과 북이 서로 상대의 언행을 문제삼자면 아마 끝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서로 자극하지 않는 것 못지 않게 상대의 체제와 사고를 이해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

남북간 화해와 협력이라는 과정은 낯선 상대를 서로 이해하고 배우는 기간이라 볼 수 있다. 자기 생각을 언론에 자유로이 이야기하고 이를 보도하는 것은 남한 체제의 중요한 버팀목이다.

북한이 이를 탓한다면 남한 사회 '길들이기' 아니면 남한 체제를 부정하려는 저의가 깔린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정부.대한적십자사는 이번 일에 원칙적이고 의연한 자세로 대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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