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귀병 투병 22년, 삶의 끈 안 놓은 건 …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6면

28일 인천시 남동구 만수동 ‘고운님 노인요양원’에서 원장 이명은(43)씨가 할머니의 손을 잡고 함께 그림을 그리고 있다. [안성식 기자]

지난 14일 인천시 남동구 만수동 ‘고운님 노인요양원’. 원장 이명은(43)씨가 “이제 같이 걸어볼까요”라며 할머니(83)를 부축했다. 그런데 정작 이씨는 일어서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그의 허리는 앞으로 30도 정도 휘어 있었다. 금방 넘어질 것 같았다. 이씨는 희귀·난치성 질병인 강직성척추염 환자다. 그의 목과 어깨 관절은 거의 굳어 있는 상태다. 팔조차 맘대로 펼 수 없다. 이씨는 “병에 걸린 후엔 언제 하늘을 올려다 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의 병은 22년 전 무릎에서 시작됐다. 당시 대학교 2학년이던 이씨는 무릎에 시큰거리는 통증이 왔다. 동네 의원에선 왼쪽 무릎에 신경통이 있다는 진단을 내렸다. 이씨는 목발을 짚고 학교를 다녔다. 종로 한약상에서 신경통에 특효라는 지네까지 사서 먹었다. 이씨는 “대학병원부터 용하다는 지압원까지 모두 찾아 다녔지만 통증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씨는 8년이 지나서야 자신을 괴롭혔던 통증의 원인을 찾았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강직성척추염 진단을 받은 것이다. 의사는 “뼈 마디의 관절 부위에 염증이 생기고 이것이 면역세포를 공격해 관절이 뻣뻣하게 굳어지는 병”이라고 설명했다. 국내에 등록된 강직성척추염 환자는 겨우 2만 명 정도다. 이씨는 “나는 확진에 8년 걸렸지만 11년이 걸린 사람도 있다”며 “지금도 희귀병에 걸린지도 모르고 그냥 살아가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무릎에서 시작된 병은 얼굴까지 번졌다. 턱의 관절이 굳어 입을 벌리기도 힘들었다.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멀쩡했던 이도 하나 둘 빠졌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입사했다. 6년간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1996년 힘들게 입사한 회사를 그만둬야 했다.

그는 증상이 악화되는 것을 막아주는 주사를 매주 2번 맞았다. 주사와 재활 치료에 월 150만원이 넘게 들어갔다. 거동이 힘든 그를 돌봐줄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건강보험은 최장 2년만 적용됐다. 희귀·난치병 환자를 위한 치료와 재활 지원 시스템은 거의 갖춰진 게 없었다. 할 수 없이 부모님에게 손을 벌려야만 했다. 인천에서 혼자 살던 그는 서울의 부모님 집으로 들어갔다.

이씨는 “음식물을 제대로 씹을 수 없어 죽으로 연명했다. 밥을 먹다가 빠진 이를 삼킬 뻔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70㎏까지 나가던 몸무게는 50㎏으로 줄었다.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게 절망적이었다.

2003년부터 병세가 더 이상 나빠지지 않았다. 뭔가 해야겠다는 의지가 꿈틀거렸다. 그는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이씨는 “건강할 때는 혼자 살기 바빴는데 내가 아파 보니까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싶었다”고 말했다.

2005년 8년 동안의 방황을 접고 명지대 사회복지학과 석사 과정에 입학했다. 석사를 마치고 박사 과정을 밟던 그는 지난해 12월 ‘고운님 노인요양원’을 열었다. 그는 요양원을 열기 위해 부모님 도움으로 마련한 서울의 115㎡(35평형)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까지 했다.

이씨의 요양원은 문을 연 지 한 달밖에 안 돼 현재 노인이 세 명뿐이다. 사회복지사 두 명과 간호보조사 두 명의 인건비도 충당할 수 없다. 한 달에 1000만원가량 적자가 난다. 현재 독신인 이씨는 당분간 결혼할 생각이 없다. 요양원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다른 맘을 먹을 여유가 없다.

그러나 이씨는 요즘 마음이 즐겁다. 그는 “병을 얻기 전의 삶보다 지금이 더 행복하다. 건강할 때는 몰랐던, 남에게 봉사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라며 웃었다.

글=강기헌·심새롬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