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구조조정, 이제 시작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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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부실기업 퇴출을 놓고 흔들리던 정부와 채권단의 태도가 시장원리에 따라 원칙대로 처리하라는 金대통령의 언급이 나오자 강경한 방향으로 돌아섰다.

이번의 부실처리 방안이 얼마나 실효를 거둘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적어도 그간의 눈치보기에서 진일보했다는 측면은 높이 사주고 싶다.

*** 개혁의지와 성과는 별개

구조조정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과연 이 정부에 개혁의 의지와 능력이 남아있는가를 의심할 정도로 악화일로에 있었다.

자체 구조조정을 목전에 둔 채권은행에 자율적으로 부실판정을 하라는 것부터 문제였다.

기업부실을 파헤칠수록 자신의 부실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채권은행이 소신 있는 판정을 내리기를 기대하긴 힘들다.

정부가 전면에 나서 책임을 지는 것이 바로 시장이 요구하는 첫번째 원칙인 것이다.

금융감독원의 부패 사례가 돌출하며 위기감을 느낀 정부가 국면전환의 일환으로 태도 변화를 일으킨 것이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맞을 땐 맞더라도 정도를 따르는 것이 정부의 올바른 선택이다. 적어도 개혁의 의지는 실종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점이 이번 조치의 수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개혁의 의지를 표시하는 것과 가시적인 성과를 가져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부실 판정은 문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시작에 불과하다.

하청업체와 딸린 식구가 많은 기업의 부실처리에는 실업이나 연쇄부도와 같은 실물분야의 파장도 따르지만 은행부실의 증가로 금융구조조정의 부담이 커진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이번 조치로 문제의 핵심에 한발 더 다가서긴 했지만 아직 해결된 것은 별로 없다는 얘기다.

구조조정의 일차적 목표는 자율경쟁의 논리가 통하는 시장경제체제를 정립하는 데 있다.

실물분야에서는 경제력의 집중을 완화해줄 재벌개혁이, 금융분야에서는 시장안정을 위한 금융기관들의 자생력 회복이 구조조정의 핵심 내용이 된다.

그런데 최근의 논의를 보면 부실을 모조리 없애는 것이 구조조정이라는 인식과 부실처리는 곧 공적자금이라는 공식이 일반화되어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 이런 비현실적이고 무책임한 논리부터 고쳐야 한다. 부실은 기업이나 은행이 일단 자생력을 갖춘 후 스스로 없애 나가게 해야 한다.

정부는 이들이 그런 능력을 갖추게 만드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공적자금만 투입해야 한다.

기업 퇴출의 증가로 예고된 40조원의 추가 공적자금이 모자랄 것이라는 얘기를 꺼내기 전에 1백조원을 넘게 쓰고도 은행부실이 크게 줄지 않은 이유부터 생각해야 한다.

구조조정을 원칙대로 한다는 것은 결국 시장이 제 기능을 하게 만드는 것이지 자의적일 수밖에 없는 기준에 근거해 열심히 부실을 파헤치는 것이 아니다.

외국에서 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우리도 따라 하면 될 것이라는 어리석은 환상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현 시점에서 구조조정 성공을 위한 최선의 화두는 우선순위를 정하고 한가지에 집중하는 것이다.

합병이나 지주회사와 같은 불확실한 실험은 나중으로 미루자. 기업을 상대로 하는 개별 금융기관의 회생에 온 힘을 기울여 자금이 돌고 시장이 움직이게 만들어야 한다.

구조조정을 하면 시장불안은 불가피하다는 패배주의적 생각에서 벗어나 시장을 안정시키는 것이 바로 구조조정의 지향점이라고 믿어야 한다.

*** 금융시장부터 살려놔야

이 참에 재벌개혁까지 해볼까 하는 유혹은 버려야 한다. 현대사태에서 보듯이 가장 강력한 재벌정책은 시장의 규율이다.

이를 위해 정부가 할 일은 지배구조개선과 경쟁촉진을 위한 제도적 틀을 체계적으로 제공하는 것이다.

지금 당장은 그저 이것이 마지막이다 하는 심정으로 가장 중요한 일 하나, 즉 금융시장을 살리는 일에만 전력을 다해야 한다.

여기에서도 단기 부양책에 대한 미련은 과감히 떨치고 오로지 은행체질 개선과 시장제도 정립이라는 정면승부를 벌여야 한다.

현재 쓸 수 있는 정책수단이나 정부의 일하는 방식에 대한 시장의 신뢰도를 고려할 때 지금은 여러가지 일을 동시에 추진할 때가 아니다.

연말까지 모든 것을 마치겠다는 약속은 안지켜져도 좋으니 이번만큼은 용두사미 구조조정이 되지 않기를 기대해 본다.

전주성 <이화여대교수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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