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엽의 독서칼럼] 차이 무시한 서구의 동화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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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지구화에 대한 논의가 한참 무성하다.

그것은 대단히 장구한 과정으로 볼 수도 있고, 1970년대 이래 자본주의 발전의 새로운 국면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

나는 후자가 분석적으로는 더 유용하겠지만, 역사적 성찰의 측면에서 보면 전자의 시각을 택하는 것도 매우 교훈적이라고 생각한다.

전자의 시각에서 보면 지구화의 원점은 역시 1492년 크리스토발 콜론(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그의 스페인식 본명 크리스토발 콜론의 미국식 명명이다)의 대서양 횡단이다.

하지만 크리스토발 콜론이 남겼다는 항해록은 전하지 않는다. 남아있는 것은 1790년에야 우연히 발견된 라스 카사스 신부의 필사 축약본이다.

몇달전 나온 '콜럼버스 항해록' (범우사)이 그것이다. 이런 경우 날조 가능성이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카사스 신부의 이력을 염두에 둔다면, 그럴 가능성은 대단히 낮다.

카사스 신부는 처음에는 아메리카 토착민들에 대한 동화주의적인 복음 전파에 노력했다. 하지만 유럽의 정복자들이 토착민들에게 가한 야만적인 대우에 분노하였고, 점차 인디언의 '타자성' 을 진정으로 승인한 최초의 사람이다.

그가 1550년 황제 앞에서 세풀베다와 벌인 발로달리드 논쟁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세풀베다는 인신공양을 일삼는 열등한 존재인 인디언들에 대한 서구의 지배는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카사스는 누구나 자신의 나라 법을 지키는 한 선한 시민이며, 그런 한에서 자기 종족의 법인 인신공양을 따르는 자는 비난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아들을 바친 아브라함이나 인간의 구원을 위해 신께 바쳐진 예수의 예에서 보듯 인신공양은 기독교 안에도 존재하며, 인간이 신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사랑은 희생이기에 정당하다고 반박했다.

이것은 지금 봐도 현대적인 논거들이다. 그리고 그는 엄정한 학자로서 '인디아스사' 를 저술했는데, 그가 콜론의 항해록을 요약하여 필사한 것은 이 작업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니 날조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콜론의 항해록을 펼치면 거기서 우선 발견하게 되는 것은 끝없는 황금에 대한 탐욕이다. 하지만 그렇게만 읽으면 결이 복잡한 이 텍스트에 깃든 다양한 의미를 검출하기 어렵다.

콜론의 텍스트의 여러 층 중에서도 내게 특히 흥미로운 것은, 인간이 한번도 만난 적 없는 타자를 만나는 순간에 어떻게 그 사태를 관찰하고 해석하는가 하는 점이다.

콜론은 인디언들이 "한결같이 다리가 매우 곧고 배도 나오지 않아, 자태가 매우 아름답다" (84쪽)며, "사랑이 흘러넘치고 욕심도 없으며 모든 면에서 유순한 존재" (216쪽)라고 말한다.

그러나 " '고귀한 야만인' 들은 곧장 금과 유리조각을 교환하는 어리석은 존재로 취급되고" (82.110쪽), "1백명쯤 되어도 에스파니아인 1명이 괴롭히면 달아날 정도로" (134쪽) 겁 많은 존재로 비하된다.

그는 "이들에게는 아무 종교도 없기에 쉽게 개종이 가능하다고 믿으며, 얼마든지 '채집' 하여 스페인으로 실어가도 좋은 존재" (136쪽)로 파악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곧장 그들을 서구 문화와 동화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과 그들을 착취하고 지배하려는 의지로 나간다.

"그들은 명령을 내리거나 일을 시키거나, 작물을 심게 하거나 필요한 그 밖의 모든 일을 시키기에 아주 적당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마을을 건설하게 하고, 옷을 입고 다니도록 우리의 관습을 가르치기만 하면 됩니다" (188쪽).

토도로프가 '아메리카의 정복' 에서 지적했듯이, 이런 콜론의 생각에는 식민주의자의 두 가지 위험한 생각이 깃들어 있다.

콜론은 인디언이 인간이면서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인지했지만, 그것으로부터 차이를 인정하는 평등주의로 나아가지 않고 평등을 동일성으로, 그리고 차이를 열등성으로 파악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다.

전자는 차이를 무시한 동화주의를 낳고, 후자는 지배의 정당화로 나아간다. 이런 점에서 뒤이어질 서구의 비서구에 대한 지배의 역사 안에서 나타나는 생각의 틀이 맹아적으로 잠복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과거의 역사만은 아니다. 평등을 동일성과 강제적 동화주의로 전환하고, 차이를 열등성과 지배의 정당화로 치환하는 것은 지배의 일반적 전략으로 지금 우리들의 일상 속에서도 관철되고 있으며, 피지배자들의 자기 인식까지 물들이며, 그리하여 지배에 도전하려는 사람들의 생각마저 파편화시키고 있다.

굳이 예를 들지 않아도 독자들은 우리 주변에서 그런 것을 여럿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김종엽 <한신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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