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23) 수도 재탈환, 중공군 역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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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를 들고 나와 우리를 환영해주는 사람들이 몇몇 보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힘에 겨워 보였다. 중공군 점령하의 서울에 남아 있던 사람은 20만 명 정도였다. 대개는 굶주림과 병고에 시달렸던 것으로 안다. 조금 과장을 하자면 서울에 있던 사람들은 거지의 행색과 다름없었다. 개전 이후 수도 서울은 이렇게 병들고 지쳐 있었다.

내가 탄 지프는 마포를 지나 만리동의 한 초등학교(당시엔 국민학교)에 차려진 국군 1사단 사령부로 향했다. 매슈 리지웨이 미 8군 사령관은 동행하지 않았다. 그는 여주의 미 8군 사령부로 갔다. 그는 서울 탈환을 자신의 최고 작전이라며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분노했다고 한다. 진격 작전에서 수도 서울 탈환을 맨 뒷자리에 뒀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정치적인 의미를 강조했던 것이다. 리지웨이는 그에 비해 실질을 먼저 생각했다. 누가 옳고 그르냐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다. 수도를 되찾았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제임스 밴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이 강력한 서울 사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동원한 미군 대포가 1951년 4월 말 중공군이 공세를 펴던 경기도 송추 방향으로 불을 뿜고 있다. 밴플리트 사령관은 중앙청에서 마포까지 대포 400문을 배치해 당시 서울을 노리던 중공군의 기세를 꺾었다. [백선엽 장군 제공]


서울-. 구한말까지는 한양(漢陽)과 한성(漢城)으로 불렸던 이곳은 조선과 대한민국의 얼이 깃든 곳이다. 서울은 대한민국의 심장이자, 배꼽이다. 남으로 경상과 전라, 북으로는 평안도와 함경도가 다 서울을 통해 이어진다. 한강이 지나가고 이 땅 모든 산맥의 정기도 모인다.

서울을 적에게 내준 것은 분명히 치욕이다. 개전 초였다. 국군 1사단의 예하 연대수색중대와 인접 중대의 김모 소위 등 세 명의 장교가 함께 자결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1사단은 봉일천에서 적과 치열한 방어전을 벌이던 중 후방의 한강철교가 폭파되고 서울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미 퇴로가 차단된 것이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들은 사단이 정상적인 퇴로를 포기하고 행주를 목표로 철수하자 전세가 이미 기울었다는 극도의 절망감에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그 셋 모두는 월남한 사람들이다. 부모형제가 공산 치하에 남아 있어 언젠가는 고향 땅을 회복해 가족들과 다시 만날 날만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었다. 그들이 그 아까운 목숨을 끊기로 한 것은 서울이 적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적에게 수도를 빼앗기고 국군이 한 없이 밀려가는 상황, 그들에게는 그만 한 좌절이 없었던 것 같다. 장교가 적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은 분명히 잘못이다. 마지막까지 총을 잡고 대항해야 한다. 군인이 걸어야 할 길이다. 그러나 이들 세 장교는 절박한 심리적 상황에서 다른 길을 택했다. 아쉬움이 클 뿐이다. 그만큼 서울은 그들에게 재기와 희망의 상징이었던 셈이다.

외국인의 시각도 다르지 않다. 나중의 이야기지만 리지웨이 8군 사령관은 6·25전쟁에 참전한 지 4개월 뒤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를 대체해 도쿄(東京)의 유엔군총사령부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그 뒤를 이어 8군 사령관으로 온 사람이 제임스 밴플리트(1892~1992) 장군이다.

그가 부임하자 중공군의 5차 1단계 공세가 시작된다. 51년 4월 말의 일이다. 공세가 만만치 않았다. 서울이 다시 위험에 빠지고 있었다. 도쿄로 간 리지웨이 유엔군총사령관은 “상황이 불리하면 한강 이남으로 다시 철수하라”고 했다. 밴플리트 장군은 그러나 대포 400문을 동원했다. 서울 중앙청에서 마포까지 대포를 배치했다. ‘더 이상의 후퇴는 없다’는 포고였다. 그는 이어 미 8군에 출입하는 기자단에게 이렇게 말했다. “서울은 한국인들의 마음속 고향이다. 말하자면 서울은 한국인의 심장이다. 지금까지 두 번 적에게 이 서울을 내줬으면 됐지, 세 번은 내줄 수 없다.” 그는 중앙청에서 마포까지 줄을 지어 세운 대포로 송추 방향에 포격을 이용한 적 저지선을 설정했다. 적의 남하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다. 그렇게 많은 대포를 동원해 결사항전의 의지를 보여준 이국(異國)의 장수에게 나는 당시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서울은 이런 것이다. 외국의 장수에게나 사선(死線)을 넘나드는 자국의 장병에게나 단순한 상징 이상의 것이다. 서울은 이렇게 지켜졌다. 수도를 잃는 자는 민족의 얼굴을 잃는 것과 다름없다. 북한의 위협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서울의 의미는 지금도 소중하다. 국가의 힘을 서울로 응집해 적의 위협을 물리친다는 차원의 군사적 의미 또한 크다. 서울은 여러모로 아름다운 도시다. 또 세계적으로 힘차게 부상하는 대한민국의 간판이다. 서울의 아름다움과 빼어난 기품 뒤에는 그를 지키고 가꾸려고 흘렸던 수많은 사람의 피와 땀이 어려 있다.

백선엽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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