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약학계 원로 고 녹암 한구동 박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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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지난 20일 93세를 일기로 별세한 녹암(綠巖) 한구동(韓龜東.학술원 회원)박사의 빈소가 차려진 삼성서울병원 영안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두 명의 교수가 발인을 하루 앞둔 22일 소줏잔을 기울이며 학창시절을 반추했다.

한 명은 중앙대 약대 학장을 지낸 한덕룡(韓德龍.74.전 대한약학회장)명예교수, 다른 한 명은 서울대 한병훈(韓秉勳.67.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명예교수.

이미 약학계의 원로반열에 오른 두 사람에게 韓박사는 하늘같던 스승이었다. 약학이란 학문이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절, 약학을 학문으로 존재하게 만든 고인의 족적이 두 사람의 대화에서 묻어났다.

▶한덕룡〓어젯밤 꿈을 꾸는데 이 양반이 어디를 가시는거야. "어디가십니까" 하고 따라가다가 잠이 깼는데 그게 부음소식일 줄이야…. 선생님 강의논법은 참 특이했지. 쭉 설명을 한 뒤 꼭 "이건 왜 이런 것일까" 하면서 본질적인 문제를 되묻곤 했잖아.

▶한병훈〓강의에 도취하신 분 같았어요. 제자들과 나누는 토론이라면 하루종일도 좋았구요. 밥벌어 먹으려고 강의하신게 아니라 학문이 즐거움이자 인생 그 자체였던 분이셨어요. 이런 분이 표상으로 우뚝 서 있었으니 우리들도 학문을 제대로 할 수 있었던 것 아닙니까.

▶한덕룡〓암. 그땐 약학이 화학을 앞질러 다른 학문을 선도했었지. 내면은 강하면서도 몹시 온유한 분이셨어. 평생 남 욕하는 것을 한 번도 못봤으니까.

▶한병훈〓한마디로 학문이 곧 인생이었고, 처세는 청초한 분이셨죠. 국내 약학박사 2호인 고인은 해방 후 공백기에 있던 약학계를 조직화해 발전시킨 인물이다.

우리나라 약학박사 1호는 홍문화(洪文和.84)박사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 고인을 최초의 약학박사로 봐도 무방하다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이다.

1946년부터 서울대 약대 교수로 재직했던 고인은 9년 후배인 洪박사의 논문을 심사해 그에게 1호박사의 영예를 안겨준 뒤 자신은 洪박사로부터 논문심사를 받아 국내 2호박사로 등록했기 때문이다.

약계.약학계의 큰 봉우리답게 고인은 주요 보직을 다 거쳤다.

세차례의 서울대 약대학장(50, 53~57, 58~62년).대한약사회장(3~6, 9회)과 함께 54년 우리나라 최고의 학자들로 구성된 학술원 평생회원으로 위촉됐다.

자연과학 부문 최고의 학자에게 수여하는 학술원 저작상을 비롯, 황조소성훈장(62년).학술문화훈장 국민장(63년)등을 받기도 했다.

학문뿐 아니라 청렴한 처신으로도 후학들의 귀감이 됐다. 학문의 속성상 제약회사와의 유착 등으로 잡음이 생길 수 있었지만 고인은 한번의 잡음도 내지 않았다.

맏아들 건우(67)씨는 "과학자들의 발견은 순수한 영감(靈感)에서 나온다" 며 "금전이나 명예를 탐하면 학문적 순수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아버님의 믿음이셨다" 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어린아이처럼 소박한 동심을 간직했다. 아인슈타인이 동네 어린이의 산수숙제를 풀어주면서 노년의 기쁨을 누렸던 것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과학지식을 선사하는 것이 그의 큰 기쁨이었다.

막내딸 보란(48)씨는 "평소 과묵했던 아버지였지만 어쩌다 술만 드시면 잠자던 남매들을 모두 깨워 아인슈타인.패러데이 같은 과학자들의 삶을 설명해 주시는 것이 낙이셨다" 고 회고했다.

2년 전부터 대장암과 싸우면서 인공항문에 의존해온 고인은 암세포가 온몸에 퍼지는 상황에서도 삶의 전부나 다름없었던 학문을 곁에서 놓지 않았다.

그의 병석에서는 지난한 투병생활을 짐작케 하는 자그마한 수첩이 하나 발견됐다. 악력(握力)을 거의 소진한 상태에서 남긴 병상메모에는 물리학적 지식.우주의 원리.인간의 한계 등이 초등학교 1년생 글씨처럼 비뚤비뚤하고 꼬부랑하게 가득 적혀 있었다.

강민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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