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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누가 안중근을 ‘반쪽이’ 만들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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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올 초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한 신년 음악회가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렸다. 주최 측인지라 오랜만에 서초동을 찾아온 문화부의 관리 몇이 한 울타리 안에 있는 서예박물관을 들렀다. 평소 발걸음을 안 하던 이들이 모처럼 찾아주니 박물관 사람들은 신이 나서 버선발로 달려 나갔다. 마침 안중근 의사(1879~1910)의 유묵전이 열리고 있던 터라 안내를 할 참으로 자료까지 착실히 챙겼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문화부 관리들은 무슨 전시가 열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들의 관심은 서예박물관 건물이었다. 이 공간을 문화부 산하의 다른 기관이 쓸 수 있게 비워줬으면 하는 뜻을 내비치더라는 것이다. 혹시 문화부 장관이 들르려나 내심 기대했던 관계자들은 뒤통수를 맞은 듯 멍했다.

지난해 안중근 의사 의거 100돌, 올해 순국 100돌을 맞아 기획된 ‘안중근 유묵전-독립을 넘어 평화로’를 본 정부 관료는 현재까지 국방부 장관이 유일하다고 한다. 2월 15일까지 연장 전시에 들어가게 된 것은 오로지 전시장을 찾은 시민들 덕이다. 현장을 지키고 있는 기획자들 말을 들어보면 전시를 보기 전과 후의 관람자들 태도가 많이 달라진다. 일본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의병대장으로만 안 의사를 알던 사람들이 그가 옥에서 남긴 글씨를 보고 나면 절로 우러나는 존경심을 표하며 눈시울을 붉힌다.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나서 옥 안에서 쓰기 시작한 안 의사의 붓글씨는 죽음을 예술로 바꾼 극적 결과물이다. 세계사에 이런 예는 극히 희귀할 것이다. 그해 3월 26일 사형이 집행되기까지 단 40여 일에 불꽃처럼 타오른 마음의 힘으로 쓴 글씨다. 31살 짧은 삶에 어찌 그리 두터운 공부를 했을까 고개가 숙여진다. 일찌감치 안 의사의 이런 전모를 알아봤던 이기웅 열화당 대표는 『안중근 전쟁, 끝나지 않았다』의 개정판을 내며 ‘한마디 한마디가 동양 고전 속에 핀 꽃들이었다’고 감탄했다.

‘만약 안 의사가 남긴 것이 글씨가 아니고 그림이었다면’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아마도 엄청난 반향이 일지 않았을까. 한문을 멀리하고, 서예 전통을 놓쳐버린 못난 후손 탓에 안 의사의 진면목이 괄호 안에 들어가 버렸다.

안중근 의사는 한 손에 총을, 또 한 손에 붓을 든 문무(文武) 겸비의 선비였다. 그동안 우리가 주로 본 것은 무인 안중근이었다. 반쪽이었던 셈이다. 그 다른 한쪽에는 어린 시절부터 독선생을 두고 동양 고전과 한문 교육을 받은 문인 안중근이 있다. 천주교 세례를 받으며 프랑스어 교습을 받을 만큼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인 모습도 보인다. 학교를 세운 교육계몽가였고 국채보상운동을 이끌던 사회운동가였다. 그가 재판정에서 상고를 포기하고 목숨을 담보로 하면서까지 시간을 벌어 완성하려 했던 『동양평화론』은 이런 복합적인 배경에서 태어난 것이다.

경술국치 100년을 맞은 오늘 우리는 어떤가. 하토야마 유키오 일본 총리의 ‘동아시아 공동체’를 주워섬기고 G20을 들먹이며, 세종시와 4대 강 사업을 놓고 말싸움을 벌이는 정치인들이 정작 안중근 의사가 내놓은 ‘동아시아 평화론’은 알고 있을지? 일본 월간지 ‘세카이(世界)’가 안 의사의 ‘동아시아 평화론’을 특집으로 다루고, 일본 공영방송 NHK가 한국에 들어와 몇 주씩 머물며 안중근 특집을 찍어 가는데 우리 자신은 마냥 넋 놓고 앉아 있다. 안 의사를 사이에 두고 손톱에 낀 때만큼도 못 되는 의견 차이를 빌미로 편 가르기에 열심이다. 돈을 모으네, 건물을 짓네 하지만 누구를 위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기념관을 무슨 내용으로 채울지 고민하는 모습도 찾아볼 수 없다.

중국 명나라 말기의 서예가 동기창은 ‘법식의 속박을 벗어날 수 있다면 이는 곧 그물을 뚫고 나온 물고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안 의사의 붓글씨가 바로 그 물고기다. 단추 하나 남기지 않은 안 의사가 유일하게 남긴 유품인 글씨를 보고 또 보며 거듭 연구해야 하는 까닭이다. ‘안중근 유묵전’이 열리고 있는 서예박물관이야말로 그 열띤 토론장이 될 수 있는 성소다. 국민을 짜증나게 하는 갑론을박에 해 바뀐지도 모르는 정치인들이야말로 ‘안중근 유묵전’에 와 머리 조아리고 죽비처럼 내리꽂히는 글씨 맛을 볼 때다.

정재숙 문화스포츠부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