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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바이러스와 반세기 (8)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8. 지도교수와 마찰

어느날 시버튼교수가 나를 불러 내친 김에 박사학위까지 하고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어보는 것이 아닌가.

의학미생물학에서 1등을 한 것이 크게 작용했는지 교수회의에서 내게 박사입학의 기회를 주기로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원래 계획은 2년 과정의 석사만 마치고 귀국하는 것인데 나로선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이야 미국박사가 흔하지만 당시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같이 온 다른 동료들은 2년 과정을 마치고 돌아갔지만 나는 모교인 서울대의대의 허락을 거쳐 2년 박사과정을 마저하고 귀국하기로 했다.

게다가 경사는 겹쳐 온다던가. 돼지새끼 콩팥에서 세계최초로 일본뇌염바이러스를 배양한 나의 석사논문이 저명한 의학잡지인 프로시딩스 오브 익스페리멘탈 메디신 앤드 바이올로지에 제1저자로 게재되었다.

그러나 박사과정의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원래 내가 관심을 가졌던 연구분야는 토끼세포에서 종양유발 바이러스를 배양하는 것이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연구주제가 바뀌어야했던 것이었다.

이유는 박사 첫 학기인 1957년 10월 나의 지도교수가 시버튼에서 쉬러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쉬러교수는 일본에서 군의관으로 일본뇌염 바이러스를 연구한 미생물학자로 그가 돌아오자 시버튼이 그를 나의 지도교수로서 적임자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가 지도한 첫 박사학위 학생이 됐다.

학문의 세계도 사람 사는 사회의 일이니만큼 인간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특히 학위과정 학생의 생사여탈권을 쥔 지도교수와의 원만한 관계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그 점에서 나는 불행했다고 볼 수 있다. 자상한 아버지같았던 시버튼교수와 달리 쉬러교수는 매우 까다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당한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었다. 세미나 도중 여성조교에게 '갓뎀' 이란 욕설까지 거침없이 해댈 정도였다.

게다가 동양인에 대한 그릇된 편견마저 있었다. 군복무 시절 일본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았는데 한국은 그나마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생각이 깔려있었는지 내겐 무척 까다롭게 굴었다. 특히 김치냄새를 싫어해 '테리블' 이란 표현까지 섞어가며 혐오했다.

만날 때부터 예사롭지 않은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갈등은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당시 실험실은 박사과정 조교마다 무균실이 따로 배당돼 자신이 원하는 실험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쉬러교수는 나를 불러 어떤 연구를 수행하고 있는지 기록을 보여달라고 했다. 원래 기록에 무성의한 국민성 탓도 있었지만 나는 딱히 내 연구를 따로 기록한 노트가 없었다.

쉬러교수는 혀를 끌끌 차며 누가 보더라도 알아볼 수 있게 연구과정을 일일이 기록한 노트를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일주일 후 다시 찾아가 나름대로 정리한 실험노트를 보여줬더니 여전히 노트내용이 부실하다며 이번엔 아예 나의 무균실험실을 폐쇄한다는 것이 아닌가.

연구자에게 실험실을 빼앗기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나는 수치심 때문에 다 때려치우고 돌아갈까 생각했다.

그러나 만일 내가 여기서 중도포기한다면 그것이 더욱 부끄러운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를 악물고 그가 원하는 양식에 맞춰 실험노트를 깔끔하게 정리했다. 일주일 후 다시 그에게 찾아가 제출했더니 실험실을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나는 지금도 쉬러교수가 아량이 없는 속좁은 사람이란 생각엔 변함이 없다. 물론 뛰어난 과학자라고 해서 인간성마저 좋아야한다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당시 일본뇌염 바이러스의 최고 권위자였으며 그의 말마따나 자신의 연구내용을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것은 학자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란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이호왕 <학술원 회장>

정리=홍혜걸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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