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영재 자녀를 키워보니 ① 유준열 <유태평양군 아버지>

중앙일보

입력


MY STUDY가 현대판 ‘맹모삼천지교’를 찾아 나선다. 과학수학음악미술스포츠 등 각 분야 신동들의 부모를 만나 교육비법을 분석했다. 첫 주인공은 “제비 몰러 나간다~”라는 유행어를 탄생시켰던 ‘유태평양(18)’군. 6세에 ‘흥보가’를 완창해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국악 신동이다. 유군의 뒤에는 아버지 유준열(52)씨의 헌신이 있었다.

자연스런 환경조성이 아이의 재능 꽃 피워

34살 늦깎이로 국악을 시작했던 유씨는 작은 꿈이 하나 있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밤 새는 줄 모른다고, 딱 내 모습이 그랬죠. 자식에게도 국악 공부를 시키고 싶었어요. 국악 가족,멋있지 않아요?”

유씨의 특별한 국악교육은 유군의 태교부터 시작됐다. 태어나서도 판소리사물놀이를 자주 들려줘 국악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했다. 꽹과리북 등 국악기가 아이의 장난감이 됐고 국악공연장은 놀이터가 됐다.

유씨의 스승이었던 조통달 명창의 집에도 자주 들러 흥겹게 같이 놀며 소리를 듣게 했다. “처음엔 작은 꿈 같은 것이었어요. 그런데 첫 돌을 갓 지난 아이가 냄비뚜껑으로 1시간 넘게 국악 장단을 맞추는 것을 보고 놀랐죠. 그때부턴 조금 욕심이 생기더군요. 하하.”

유군은 또래보다 말을 늦게 시작했는데, 그 첫 소리가 국악가락이었단다. 유씨는 ‘아들이 영락없는 국악인이 되겠구나’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특히 어린 유군이 즐겁게 소리를 할 수 있도록 신경 썼다. “공연을 흥겹게 즐길 줄 알아야 제대로 소리가 나와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아이에게 억지로 시켜서는 절대 재미를 붙일 수 없죠.“

농부가 비료 뿌리듯 ‘영양조리사’ 역할

유씨는 처음부터 유군을 판소리꾼으로 가르친 것은 아니었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음악적 영감’이었다. 판소리를 하되, 판소리 외의 다양한 음악을 접할 수 있도록 교육했다. “어른들도 똑 같은 일을 반복하면 지겨워 한다는 생각을 했죠. 그래서 타악기, 서양음악, 기타드럼 등 음악에 구분을 두지 않았어요.” 당시엔 유씨의 고민에 대해 상담할 수 있는 전문적인 교육기관이 없었다.

유씨는 직접 발품을 팔기 시작했다. 타악기 스승으로는 최상진(전남도립국악단원)씨, 드럼 스승은 최소리(SBS드라마 ‘장길산’ 음악감독)씨 등 그 분야 최고의 스승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유씨는 자신의 역할을 ‘영양조리사’로 표현했다. 농부가 비료를 뿌리듯 유군에게 다양한 영양분을 공급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었다는 것. “어느 특정 분야만을 고집했다면 쉽게 흥미를 잃었을 것 같아요. 부모는 단지 안내자의 역할을 할 뿐이라고 생각했죠.” 유군에게 판소리를 가르치되 판소리에만 갇히지 않도록 유연한 생각을 가질 기회를 만들었다.

유군의 성장에는 유씨 뿐 아니라 조통달 명창과의 인연도 큰 역할을 했다. 조 명창과 유군의 인연은 3살박이 유군이 첫 공연을 할 때부터다. 조 명창이 유군의 공연을 보고 천재성을 인정, 지도에 나섰던 것이다.

조 명창은 “유군은 한 가락을 가르치면 그것을 완벽히 소화하기 전까지는 연습을 끝내지 않는 연습벌레”라며 “끈기와 열정이 대단하다”고 평가했다.

아프리카유학, 한 단계 더 성장하는 계기가 돼

유씨에게도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하는 시기가 있었다. 바로 유군의 슬럼프 때문이었다. “초등 5학년을 지나면서 변성기가 찾아왔어요. 아마 아이에게 그 때가 가장 힘든 시기였을 겁니다. 어린애의 목소리를 벗어나 어른의 목소리를 찾아야 하는 시기였으니까요.” 유군에게 휴식을 주면서도 ‘음악적 영감’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유학이 묘안으로 떠올랐다. “인도 순회공연 중 타악기 공연에 감명을 받은 아이에게 타악기 본 고장의 음악을 가르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또 영국식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죠.” 유군은 케이프타운의 론데보쉬 중학교에서 4년간 ‘젬비(아프리카 전통 타악기)’를 공부하며 오케스트라 활동도 겸하는 등 다양한 음악을 접했다. 조 명창은 수시로 전화해 판소리 연습을 도와주면서 국악의 기본을 잃지 않도록 지도했다.

유씨는 유학을 결정하는 과정에 유군의 의견이 적극적으로 반영될 수 있도록 주의했다. 유학갈 나라부터 학교까지 모든 것을 상의하고 결정했다.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해선 유군 스스로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학생활은 유군을 한 단계 더 성장시키는 계기가 됐다. 유군은 2009년 2월, ‘비상’이라는 주제로 국악과 아프리카 음악을 결합한 새로운 퓨전국악 공연을 선보였다. 국제적 감각을 바탕으로 세계 무대에서 활약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든 것이다. “유학 후 ‘이제는 판소리를 제대로 하고 싶다’는 말을 했어요. 그저 국악을 좋아만 했던 어린 애가 프로의식을 갖춘 국악인이 된 거죠. 어른의 소리를 찾아가는 첫 발걸음을 제대로 뗀 셈입니다.” 현재 유군은 조 명창의 수련관에서 ‘흥보가’와 ‘수긍가’ 완창에 다시 도전하기 위해 훈련을 하고 있다.

[사진설명]유씨는 “아이가 자발적으로 참여하지 못하면 영재성이 무너진다”며 “아이의 의견을 존중하며 다음 단계의 교육을 준비하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 정현진 기자 correctroad@joongang.co.kr >

< 사진=최명헌 기자 choi315@joongang.co.kr >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