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미국발 금융개혁 … ‘한국식 금융모델’ 모색할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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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내놓은 금융개혁 방안은 규제의 폭과 강도가 예상을 뛰어넘고 있다. 상업은행들의 위험 투자를 막고 ‘대마불사’가 재현되지 않도록 금융회사의 규모까지 제한하겠다는 것이다. 1933년에 만들어졌다가 99년 사라진 ‘글래스 스티걸법’이 사실상 부활하는 셈이다. 이에 앞서 오바마 대통령은 월스트리트에 10년간 900억 달러의 금융위기 책임세를 물리겠다고 했다. 월가의 보너스 잔치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등에 업고 본격적인 금융개혁에 시동을 걸고 있는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자신의 우군이었던 월가와 불편한 관계를 각오한 게 분명해 보인다. 금융회사들의 무분별한 투자가 위기를 초래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싸움이 생긴다면 결코 싸움을 멈추지 않겠다”고 했다. 미국 납세자들도 은행들이 손실은 사회화시키고 이익은 사유화하는 것에 불만이 대단하다. 미 금융개혁이 이대로 진행되면 금융위기 재발을 막는 데는 효과를 거둘지 모른다. 그러나 국민 감정에 의존하는 정책은 반드시 후유증을 낳게 마련이다. 금융시장이 경색되면 글로벌 더블딥(이중 경기침체)을 초래할 가능성이 커진다. 미 금융회사들이 위축되면 국제 경쟁력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양날의 칼이다.

오바마의 금융개혁은 벌써 안팎에서 논쟁에 휩싸였다. 이미 미 금융업계가 격렬하게 반발하고 있다. 미 행정부 안에서도 금융규제 완화를 주도해 온 티머시 가이트너 재무장관과 로런스 서머스 국가경제회의 의장 등이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의회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개혁 의지가 상당 부분 변질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세계 금융시장의 새로운 판짜기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더 이상 글로벌 위기 이전의 미·영식 금융모델은 지속되기 어렵다. 새로운 글로벌 스탠더드는 눈앞의 자욱한 포연이 걷히고 나야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우리로선 신중히 지켜보아야 할 실험들이다. 일단 미국 금융개혁의 충격으로 인한 해외자금 탈출에 대비하는 게 급선무다. 금융감독의 사각지대를 없애려는 오바마 행정부의 노력도 눈여겨볼 필요는 있다. 그러나 한국의 금융환경이 미국과 큰 차이가 나는 현실을 감안해야 한다. 우리 은행들은 미국·영국과 달리 위험투자 비중이 극히 미미하다. 금융회사들의 겸업을 허용한 자본시장통합법도 시행된 지 일 년이 지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해외의 금융규제 붐에 편승해 자칫 과잉규제에 나서면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다른 나라의 금융개혁을 섣불리 흉내 내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설익은 금융시장 개방이 외환위기를 초래했듯이, 미국식 금융개혁을 무작정 추종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거꾸로 오바마 금융개혁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선진국들의 금융회사들이 위축되면 우리에겐 새로운 공간이 열리기 때문이다. 그동안 금융 국제화를 꿈꿔온 한국 금융회사들엔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지금은 다양한 각도로 미국의 금융개혁에 접근하면서 우리 실정에 맞는 한국식 금융모델을 차분히 모색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