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트렌드] 사극영화 '퓨전의 재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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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도포 자락 휘날리며 망원경을 들여다보는 독특한 역사극 '혈의 누'가 인기다. 펄펄 끓는 가마솥에 사람을 거꾸로 집어넣고, 범죄 용의자의 사지를 토막내는 섬뜩한 영상, 도총관(都摠管.조선시대 군무를 총괄한 자리).토포사(討捕使.조선시대 도적을 잡는 일을 맡아보던 특수직) 등의 생경한 용어, 그리고 순간순간 흐름이 바뀌는 얘기 구조 등 "대중성이 부족하다"는 일부의 지적이 무색하게 4일 개봉 이후 8일까지 닷새간 100만 명 가까운 관객을 기록했다.

흥행의 주요 코드는 현대적 구성과 내용이다. 19세기 초반 조선의 한 외딴섬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역사물이나 전개 방식과 메시지가 현대 스릴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김대승 감독은 "사극과 스릴러를 결합한 새로운 스타일이 젊은 관객에게 좋은 반응을 얻는 것 같다"며 "관직.수사용어.형벌 등의 고증도 철저히 했으나 지향점은 인간의 탐욕이 빚어내는 비극을 촘촘하게 직조한 현대적 영화"라고 설명했다. 시간.공간적 배경을 앞세운 사극이긴 하나 그게 영화의 결정적 요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7월 개봉할 '천군'(민준기 감독)은 어떤가. 활을 쏘는 이순신 장군과 자동소총을 든 남북한 군인이 한 화면에 잡힌다. 이른바 과거와 현재가 만난, 즉 SF적 상상력이 가미된 새로운 사극이다. 임진왜란 당시 명량해전에서 아이디어를 따온 클라이맥스 장면에선 첨단병기로 무장한 남북연합군이 이순신 장군의 전술을 이용해 양민을 학살하던 여진족과 격돌한다.

'혈의 누''천군'은 그전에 보지 못했던 사극이라는 점에서 닮은꼴이다. 궁중암투에 무게를 실어온 TV사극, '춘향뎐''취화선' 등 전통이 물씬 살아있는 임권택 감독의 작품과 달리 과거와 현재의 구분이 큰 의미가 없는 '퓨전사극'에 가깝다.

2005년 충무로에 사극이 진화하고 있다. 스타일.캐릭터 등에서 사극의 장르 분화가 활발하다. 옛날 영화, 철 지난 작품, 중년층이 즐기는 장르라는 식의 고정관념이 무너지고 있는 것. 영.호남 사투리가 맞붙으며 2003년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황산벌'이 댕긴 '재미있는 사극'이 올해의 키워드로 떠오를 전망이다.

예컨대 '천군'의 이순신은 TV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이순신과 성격이 크게 다르다. '성웅'의 인간적 고뇌와 무용담을 강조한 '불멸의 이순신'과 달리 '천군'의 이순신은 무과시험에도 떨어지고, 장인의 눈을 피해 변방으로 흘러든 별 볼일 없는 청년. '천군'은 16세기 조선과 오늘의 한반도를 오가며 지금까지 조명되지 않았던 '성웅'의 젊은 시절과 인간적 나약함에 주목한다.

9월 개봉 예정인 '형사'는 시.공간을 초월한 무협사극.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이명세 감독이 5년 만에 돌아온다는 점 외에도 '조선의 여형사'를 메인 캐릭터로 설정한 점이 색다르다. 시대적 배경인 조선은 영화를 떠받치는 장치일 뿐, 캐릭터.의상.액션.소품 등에서 '조선의 색깔'을 지워버렸다. 이 감독 특유의 감각적 영상을 살려내는 동시에 유럽.미국 등 외국 시장을 겨냥한 이중포석이다. 감독은 "기존 사극과 분위기가 전혀 다른 액션 멜로극이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이달 말 촬영을 시작하는 '왕의 남자'는 조선시대 광대를 내세운 권력 풍자극이다. 화제의 연극 '이'(희곡 김태웅)를 스크린에 옮긴다. '황산벌'에서 사극과 코미디 사이에 징검다리를 놓으며 전쟁의 허망함을 드러냈던 이준익 감독은 신작에서 "왕의 피를 타고난 광대와 광대의 피를 타고난 왕을 대립시키며 부질없는 권력을 조롱할 것"이라고 말했다. 감독과 배우(감우성.정진영) 모두 지난달부터 사물놀이.줄타기 연습에 비지땀을 흘리고 있다.

이 감독은 "시간과 예산이 많이 투입되는 사극은 그 나라 영상문화의 결정체이자 과거와 현재를 재해석하는 문화행위"라며 "새로운 스타일의 사극이 많이 나오는 건 충무로를 튼튼히 하는 동시에 장르의 다양화를 앞당기는 촉매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대승 감독도 "옛날 얘기를 하려고 사극을 만드는 감독은 없다"며 "결국 승부는 오늘을 바라보는 '눈'에 달려있다"고 밝혔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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