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심재륜 드림팀'이 그립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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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혹시나 해봤지만 역시나였다. 거액 신용보증 외압의혹 검찰 수사도 결국 '믿거나 말거나' 식으로 마무리돼 버린 것이다.

이제 정치적 사건은 재수사 시비 끝에 국정조사나 특별검사제 도입 주장이 나오는 것이 자연스런 수순이 돼버렸다. 검찰은 늘 최선을 다했다고 변명하지만 실망이 거듭되면서 비난하기조차 지친 지 오래다.

*** '信保외압' 결론 역시나

물론 예외도 있었다. 바로 1997년 5월 현직 대통령 아들이던 김현철(金賢哲)씨와 안기부 차장을 지낸 김기섭(金己燮)씨를 구속했던 때다.

권력 핵심 실세이던 그들을 구속하기까지 수사팀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지만 시민들은 실로 오랜만에 검찰에 박수를 보냈었다.

97년 3월 하순 검찰은 한보사건 수사를 지휘해 온 최병국(崔炳國)대검 중앙수사부장을 갑자기 경질, 후임에 심재륜(沈在淪)검사장을 임명한다.

崔중수부장이 한보사건의 몸통으로 지목됐던 현철씨를 소환조사해 혐의없다고 발표한 뒤 꼭 한달만이었다.

검찰 수사에 대한 비난 여론이 비등하던 차에 비뇨기과 의사 박경식(朴慶植)씨가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현철씨의 YTN 인사 개입 의혹 등을 폭로하는 바람에 흉흉해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검찰인사였다.

당시 청와대나 검찰 수뇌부는 적당히 수사하는 시늉만 하라고 신임 중수부장에게 공공연하게 지시했다.

그러나 沈중수부장은 부임하자마자 수사전문가를 불러 모아 80여명의 수사팀을 새로 구성하고는 현철씨 비리를 본격적으로 캐기 시작했다.

당황한 법무부.검찰 수뇌부는 물론이고 대통령 비서실, 안기부까지 나서서 강력하게 저지했지만 이미 터진 둑을 막을 수는 없었다.

현철씨 비리가 드러나기 시작하자 검찰 수뇌부는 계속 수사 중단 지시를 내렸지만 그때마다 沈부장은 사표를 들이밀며 뜻을 관철했다.

적어도 대여섯번쯤은 沈부장이 크게 충돌했다는 게 당시 검찰 주변의 얘기다. 워낙 국민적 관심이 쏠린 상태여서 검찰 수뇌부는 사표 수리는 엄두도 못낸 채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할 뿐 '속수무책이었다. 청와대 수석비서관도 전화 통화를 하자거나 식사를 하자고 달랬지만 모두 허사였다.

숨겨둔 비자금이 드러나면서 현철씨 구속이 불가피해지고 수사가 김기섭씨로 비화하자 수사 방해가 훨씬 노골화했다.

처음에는 기관끼리 입장이 어려워진다는 이유를 내세웠으나 금품수수 사실이 밝혀진 뒤에는 액수가 적으면 안된다고 조건을 달았다.

다급한 나머지 관계기관의 현직 간부가 중수부장실에서 격려금이라며 현금 뭉치를 내밀다 거절당하기도 했다.

沈부장은 이후 한동안 신변 위협까지 느꼈다고 한다. 철야수사로 거의 자정을 넘겨 퇴근했는데 그때마다 양복 차림의 건장한 '어깨' 들이 아파트 주차장 건너편에서 서성이며 감시의 눈을 번뜩이고 있더라는 것이다.

별수 없이 沈부장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현관 안으로 들어설 때까지 운전기사를 동행토록 했다.

수사 두 달 만에 김현철씨는 65억5천만원, 김기섭씨는 1억5천만원을 받은 혐의를 밝혀내자 구속하지 말라는 지시는 내려오지 않았다고 한다.

*** 현철씨 수사와 대조적

정치적 사건일수록 진실 규명에는 수사 의지와 능력이 무엇보다 요구된다. 이는 수사 의지도 중요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능력도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의미다.

김현철씨나 김기섭씨 수사 당시 충분한 범죄사실을 재빨리 밝혀냄으로써 상부의 수사 중단 지시를 버텨냈던 것이 좋은 예다. 현철씨 사건 수사팀을 당시 매스컴에서 '드림팀' 이라고 이름지은 것도 음미할 부분이다.

거액 대출 외압의혹 사건 수사팀이 이번 수사에 과연 얼마나 의지와 능력을 가졌었는지 의문이다.

예를 들어 박지원(朴智元)전 문화관광부 장관을 소환하기 전에 그를 상대로 조사할 내용을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해 놓고 있었느냐고 묻고 싶은 것이다.

더욱이 수사가 진행 중인 시점에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朴전장관은 억울하다" 고 밝혀 검찰의 공신력에 흠집을 남겼기에 더욱 궁금해진다.

현철씨 구속 당시 '드림팀' 은 발표문안 작성.결재과정에서 청와대를 오르내리며 내용이 왜곡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아예 보도자료조차 만들지 않고 간담회 형식으로 수사 결과를 발표했던 일이 새삼 생각난다.

'드림팀' 이 그립다.

권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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