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경협 국제학술회의] 上. 페리 전 미국 국방장관 기조연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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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북한 조명록(趙明祿)특사의 미국 방문으로 양국 관계가 급속도로 해빙되고 있는 가운데 미 스탠퍼드대 아태지역연구센터(원장 헨리 로언)와 경희대(총장 조정원)가 공동주최한 '남북한 경제협력 및 통합의 새도전' 국제학술회의가 9일과 10일 이틀간(현지시간) 스탠퍼드대에서 열렸다.

이 학술회의에는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미대사, 로널드 매키넌 스탠퍼드대 교수 등 외국 전문가들과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장, 박명광 경희대 부총장,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 등이 참석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스탠퍼드대 교수이며 전 대북정책조정관으로 '페리 프로세스' 를 입안한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은 9일의 기조연설을 통해 남북관계를 광범하게 조명했다.

페리의 기조연설과 10일의 전문가 토론회 내용을 2회에 걸쳐 소개한다.

현재 한반도 정세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수년 전 '전쟁 일촉즉발' 상황에서 '평화로 가는 모퉁이' 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직 안심할 정도로 평화가 정착된 것은 아니란 얘기다.

그동안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대북관계에서 한.미.일 3국간의 정책조정과 협의는 매우 중요하다. 물론 한반도에서 군사적 위기상황이 사라지면 과거와 같은 긴밀한 정책공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공통된 입장을 북측에 전달하고, 북한의 오판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같은 공조는 꼭 유지돼야 한다.

***金正日 개방의지 뚜렷

많은 이들이 북한의 변화의지를 묻는다. 지난해 5월 방북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면담에서 나는 북한이 서방세계와 접촉을 확대할 의지를 갖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당시 북한은 미사일 문제는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외무성뿐 아니라 노동당 간부들도 (군부측과 달리)서방과의 접촉 확대과정에서 치러야 할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돼 있다고 느꼈다.

이제 남북한은 화해와 협력을 향해 조심스런 걸음마를 시작했다. 남북한이 실현 가능성이 크지 않은 당장의 통일은 일단 미뤄놓고 긴장완화와 신뢰구축의 길을 택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성공하려면 북한 당국이 한국 및 외국 기업들의 투자유치를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과 사회간접자본 투자에 노력해야 한다.

나는 金위원장에게 남북간 직항(비행)노선이 상호신뢰와 해외자본 유치에 줄 긍정적 효과를 설명했고 그도 이를 이해했다.

사실 나는 金위원장과의 면담과 최근 북측 고위인사들과의 대화에서 북한이 실질적 의미에서 중국식 개방개혁 모델을 따르기로 결심했다는 인상을 받고 있다.

다만 북한 당국이 중국의 사회주의 시장경제 채택을 '배신자' 운운하며 공개 비난한 적이 있기 때문에 '중국식 모델' 이란 용어를 사용하긴 어려울 것이다.

조명록 특사를 미국에 파견키로 한 金위원장의 결정은 미국을 포함한 서방세계와의 접촉확대로 경제회생을 도모하겠다는 북측의 의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나는 북.미관계가 정상화한다 해도 미국이 대북 경제지원에 직접 기여할 대목은 많지 않다고 본다. 하지만 군사안보적 측면에서 안정된 투자와 경제활동을 보장하는 역할은 미국만이 할 수 있다.

***주한미군 역할 신중 검토를

남북 정상회담 이후 주한미군의 장래가 관심을 끌고 있지만 한반도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안정과 평화를 보장하는 역내 주둔 미군의 역할을 절대 과소평가하면 안된다.

그러나 나는 앞으로의 주한미군 규모와 역할 문제를 놓고 심각한 논의를 시작할 시점은 됐다고 생각한다.

다만 장래 계획을 구체적으로 결정하기엔 남북한간에 아직 안보와 관련된 실질적 진전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팰러 앨토(미 캘리포니아주)〓길정우.신중돈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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