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의료 인프라'가 무너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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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장기간 지속된 의료파행으로 '의료 인프라' 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지난 6월 중순 이후 세차례의 의료계 폐.파업으로 환자들이 고통을 겪고 있음은 물론 의료산업 기반 자체가 붕괴되고 있다.

대형.대학병원이 천문학적 숫자의 적자행진을 계속하고 중환자들의 해외원정 진료, 우수 의료인력의 탈출 움직임, 의학교육 현장의 부재 등 그 심각한 폐해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정말 큰 일이다. 이러다간 환자도, 의사도, 약사도 다 죽게 될 판이다.

장기간의 의료파행은 환자들의 고통과 불편만 초래한 게 아니다. 우선 병원들의 재정상태가 극도로 악화되고 있다.

국감자료에 따르면 웬만한 대형 병원은 매달 1백억원 안팎의 큰 손실을 내고 있어 그동안 이들 병원의 손실액이 1조원에 육박한다고 한다.

투쟁에 앞장서고 있는 젊은 의사들의 삶의 터전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제약회사들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의약분업으로 의약품 수요가 30% 줄어들 것으로 보고 각오하던 터에 의료파행으로 돈이 돌지 않아 사정이 좀 나은 제약회사들까지 도산위기로 내몰리고 있다. 제약회사 손실은 9월말까지만도 수천억원으로 추정됐다.

중.장기적으로 볼 때 오히려 이 보다 더 큰 문제는 의료인력의 황폐화에 있다. 수련 중인 전공의들이 실무를 제대로 익힐 기회를 갖지 못하고, 의대생들은 수업을 거부해 교육현장이 넉달째 실종되고 있다.

또한 국내 의료의 앞날을 어둡게 본 일부 의사들은 미련없이 한국을 떠날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한다.

정부와 의료계는 현 사태를 마냥 방치해선 안된다. 서로 명분과 입장만 내세우며 아웅다웅하다간 의료기반의 붕괴를 초래해 국민 모두를 피해자로 만드는 극한 상황이 우려된다.

준비안된 의약분업에 집착했다간 의료파행의 해결에 아무 도움도 안되는 현실에 눈을 돌려야 한다. 정부와 의료계는 국민을 위하는 절박한 심정으로 의료개혁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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