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두만강 대탐사] 5. 강은 대륙을 열고 있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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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중강의 맞은편 린장(臨江)에서 백두산에 오르는 길은 압록강의 아름다운 자태를 자주 숨긴 채 험준한 산간지대로 달렸다.

가끔씩 나타나는 압록강의 모습은 감탄사를 절로 자아냈다.S자로 곡류하는 강변에는 북한과 중국의 마을이 어깨를 맞대고 있었고,강물로부터 유기질 자양분을 듬뿍 받은 들판은 진노랑으로 곱게 물들고 있었다.

지도를 펼쳐보니 이 북한 마을은 풍양(豊陽),중국 마을은 안락(安樂)이란다.저 아래 안락 마을에는 고구려의 적석묘가 있단다.북한 마을에도 고구려인의 체취가 남아 있을까? 틀림없이 있으리라.강은 본디 이쪽과 저쪽을 가르지도 막지도 않으니까.

고구려 무덤이 압록강을 따라 분포하는 까닭을 그제야 알 수 있다.미천왕 을불(乙弗)이 백부(伯父) 강상왕의 정치적 탄압을 피해 압록강을 따라 소금장수를 하였다는 설화의 의미도 새롭게 다가왔다.

압록강은 한반도와 만주를 가르는 장애물도 한국과 중국을 나누는 국경선도 아니었다.오직 고구려인의 삶터를 이어주고 생명력을 불어넣는 신경망이었을 뿐이다.

이러한 압록강변에 첫 번째 수도 졸본(卒本·지금의 환런)과 두 번째 수도 국내성(지안)이 있다.하루 종일 달려 교교한 달빛과 함께 훈강(渾江)유역의 환런(桓仁)으로 들어섰다.

이튿날 아침,가파른 삭도(索道)를 타고 해발 8백20m의 오녀산성(五女山城)에 올랐다.깎아지른 절벽 위에는 잠실운동장 서너 개를 옮겨놓은 듯한 평지가 펼쳐져 있었다.

왕궁터,병사주둔지,장대,연못과 우물.지나가는 구름도 걸릴 것 같은 절벽 위에 이렇게 많은 성곽시설이 있다니 놀라웠다.천혜의 요새가 따로 없었다.

장대에 오르니 하얀 연무가 깔린 환런 분지가 한 폭의 그림처럼 다가왔다.들판은 드넓게 보였다.연무(煙霧) 아래 강변을 따라 고구려 적석묘가 산재해 있다.풍요로운 들판을 일구며 역동적인 삶을 꾸리던 고구려인의 모습이 아련히 잡혔다.

눈을 동쪽으로 돌리니 거대한 호수가 보였다.환런댐이었다.졸본성은 댐의 물 속 어디에 있을 것이다.2백여 기 이상의 적석묘를 가진 고력묘자(高力墓子) 고분군도 그 근처 어디에 수몰되어 있을 것이다.

산성을 막 내려오는데 누군가가 혼잣말을 했다.“이런 절벽 위를 어떻게 도성으로 사용하였을까.” 듣고 보니 그랬다.모름지기 도성은 방어기능이 뛰어나야 하지만 사람과 물자도 쉽게 오갈 수 있어야 한다.

고구려인의 지혜는 바로 여기에 담겨 있다.그들은 항상 도성을 두 개 건설했다.평상시 거주하는 평지성과 비상시 방어용 산성을 한 세트로 말이다.

탐사단은 고구려 역사를 좇아 환런에서 지안으로 들어갔다.험준한 라오링(老嶺)산맥은 국내성 천도가 예사롭지 않은 사건이었음을 말해주었다.협곡을 지나고 산줄기를 넘기를 여러 차례,마침내 지안 분지로 들어섰다.압록강 건너 북한 산야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오른쪽으로 우산(禹山)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그 아래로 수천 기의 고분이 열을 지어 있다.‘만주의 소강남(小江南)'이라더니 정말 포근하고 따스하게 느껴졌다.

하룻밤 여독을 푼 탐사단은 우산에 올랐다.압록강을 따라 길게 펼쳐진 지안 분지와 산허리에 걸쳐진 북한쪽 도로가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광개토대왕비·태왕릉·오회분·국내성·칠성산고분군이 차례로 도드라졌다.이곳이 4백여 년 간 고구려 수도였음을 웅변이라도 하듯이.장군총과 무용총,각저총은 산줄기에 가려져 있었다.

강 건너 북한의 별오리와 미타동에도 적석묘가 있단다.강의 이쪽과 저쪽이 본디 하나였음을 다시 한번 실감나게 한다.통일된 뒤 북한의 산에 오르면 이 모든 것이 하나로 보일 것이다.

우산을 내려온 탐사단은 만포철교로 갔다.반달 모양의 하해방(下解放) 들판이 반갑게 맞아주었다.강은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건너편 산에 비친 석양을 되받아 은빛 여울을 빚어내고 있었다.조금만 올라가면 햇빛을 상징하는 수신(隧神)을 모시던 국동대혈(國東大穴)이 있다.

고구려인들은 해마다 10월이면 수신을 모셔다가 온 세상을 담고도 남을 만큼 잔잔한 이 강물에서 제사를 지냈다.

그것은 만물의 근원인 햇빛과 물을 하나로 결합시키는,그래서 풍성한 수확에 감사드리고 또 다른 풍요를 기원하는 신성한 의식이었다.

그런 만큼 제장(祭場)은 고구려 사람이라면 어디서든 쉽게 오갈 수 있어야 한다.조금 외진 환런 분지에서 압록강 한복판으로 수도를 옮긴 까닭은 여기에 있었다.물론 요동(遼東)에 가까운 환런보다 라오링산맥을 등진 지안은 방어기능도 뛰어났다.

고구려인의 삶터를 이어주던 신경망,그 압록강이 대동맥으로 거듭 태어나는 데는 오랜 인고의 세월이 필요하였다.위쪽은 백두산으로 가로막혀 있었고,아래쪽 바닷길은 중국세력에게 봉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먼저 백두를 넘어 동해안과 두만강 일대로 나아가 배후기지를 건설한 다음,여러 차례 좌절 끝에 311년(미천왕 12년) 압록강 하구를 장악하였다.

서해에서 백두를 거쳐 동해에 이르는 대동맥이 열리는 순간이었다.그렇지만 기쁨도 잠깐.342년(고국원왕 12년) 전연(前燕)에게 수도가 함락되고 미천왕의 시신을 탈취 당하였다.

고구려인들은 다시 두 강의 아래위를 살폈다.두 강 너머 중국세력,유목민,농경민,산림족 등과 다양한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익힌 국제감각이 총동원되었다.

국제질서는 급변하고 있었다.새로운 외교전략이 필요하였다.이에 북중국을 장악한 전연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고,내실을 다지면서 두 강 너머 여러 세력을 차례로 공략하는 전략을 짰다.

광개토왕은 이를 구현하여 대제국을 건설하였다.두만강까지 이어진 압록강은 동해와 서해를 잇는 대동맥 나아가 동북아의 중심 축으로 발돋움하였다.

이 새로운 천하의 중심은 압록강 한복판의 국내성이었다.탐사단이 만포철교를 떠날 무렵,무덤 하나가 석양을 받으며 들판을 외롭게 지키고 있었다.광개토왕대 장수였던 모두루(牟頭婁)의 무덤이다.무덤 속에는 지금도 ‘이곳이 천하 사방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이라는 고구려인의 자긍심이 선명하게 적혀 있을 것이다.

탐사를 마치고 귀국하니 경의선 복원 착공식은 구문이 되어 있었다.가까운 지인에게 선양(瀋陽)∼단둥(丹東)에도 고속도로 공사가 한창이더라고 전하니 자못 흥분하는 눈치이다.

머지않아 압록강은 통일 한국과 중국의 새로운 국경이 될 것이다.복원된 경의선과 중국의 선∼단간 고속도로로 수많은 사람과 물자가 오갈 것이다.그렇지만,압록강을 양국의 공존공영을 보장하는 진정한 국경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냉철하고 탁월한 국제감각이 필요하다.

압록강변 고구려 유적에서 ‘그 옛날 이곳이 우리 땅이었지’라는 감상에만 젖는다면 이는 불가능하다.지금 그곳이 중국 땅임을 인정하고 중국의 실체를 정확히 인식하려고 할 때,고구려사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압록∼두만강을 이 시대의 새로운 대동맥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중국 현지인의 무덤에 의해 파괴되는 고구려 고분,각종 건설공사로 파괴되고 있는 국내성,심지어 저자거리 천막에 가려진 국내성 표지판 등의 보존방안을 놓고 중국 당국과 머리 맞대고 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여호규 <한국외국어대 강사·고구려사>

사진=장문기 기자

◇ 압록·두만강 대탐사 특집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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