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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와 10시간] 송강호 "대박이요? 저 요즘 백수예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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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전에 송강호(34)씨를 어느 영화 시사회장에서 본 적이 있다.일면식도 없었던 당시 영화가 끝나고 화장실 변기 앞에 섰을 때 바로 내 옆에서 그가 볼 일을 보고 있었다.어쩌면 가장 솔직한 순간에 만나 그런지 그때의 첫인상은 무척 명징했다.

매서운 눈빛에 과묵한 인상, 그리고 매끈한 갈색 정장과 엷은 색 선글라스를 낀 모습은 시선을 사로잡는 미남형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배, 배, 배 배신이야. 배신" 이라며 억센 사투리를 구사하는 투박한 '넘버3' 의 그도 아니었다.

'헝그리 정신' 의 이전 모습과 '쉬리' 의 특수요원의 이미지가 오버랩하는, 참으로 묘한 인상이었다.그게 배우로서 그의 강점이 아닌가.

인터뷰를 위해 그를 만난 곳은 대학로에 있는 명필름 사무실이었다.그곳은 아담한 한옥을 개조해 꾸민 일터로 마당에 은행나무와 모과나무가 있고 도로와도 멀찍이 떨어져 조용한 대화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요즘 기분도 좋고 바쁘죠. "

"아이고, 안 그렇습니다.전 요즘 백수잖아요. 집에서 애도 보고 그러는데…. " 공동경비구역 JSA' 의 질주로 마치 붕 떠있을 것 같아 해본 질문에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영화의 성공에 대해서는 "다음 작품도 생각해야 하니까 담담해지려고 노력한다" 고 말했다.데뷔작 '초록물고기' 이후 그가 출연해 실패한 영화가 없다.

'쉬리' 의 기록을 'JSA' 가 깨고 있으니 그는 한국영화사에 둘도 없는 행운아다.이런 이유를 그에게 물어도 "사람복이 많아서" "운이 좋아서" 정도로만 답했다.

영화 데뷔 이후 승승장구하고 있는 그에겐 마음 고생이 없었을까. 아무래도 '쉬리' 가 뼈아프다.극중에서 자신의 페이스를 찾지 못하고 흔들렸다.그래서 코믹 연기는 되지만 진지한 역할은 어렵지 않느냐는 말도 나왔다.

" '반칙왕' 찍을 때 제일 외롭고 힘들었어요. 촬영 전 체육관에서 레슬링 훈련을 혼자 석달 동안 받았어요. 육체적으로 괴로운 데다 뭔가 보여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렸으니까요. "

하지만 그는 보란듯이 '반칙왕' 에서 연기의 폭이 좁다는 인식을 깼고 서울 관객 80만명을 동원하며 흥행에도 성공을 거뒀다.

그 여세를 몰아 'JSA' 에선 북한군 오중사 역을 독특하게 해석해 밀도있는 연기를 펼쳐보였다.

이야기 도중 그가 출출하다고 했다.저녁을 먹기엔 이른 시간이었지만 그럴 만도 한 것이, 말을 시작했다 하면 물 만난 고기처럼 퍼득인다.

특히 작품이나 연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달변가로 변하는데 표정.몸짓.말투에 어눌한 구석이 도무지 없다.

"칼국수 어때요?" 메뉴를 그가 정하곤 곧장 길을 안내했다.대학로는 골목길 사정까지 훤했다.

영화 데뷔 전 이곳에서 6년을 굴렀으니까.

"참 오랜만이네요. 연극할 땐 이것도 비싸서 못 먹었는데…. " 그 말끝에는 영화 데뷔 전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때의 아스라한 추억이 살짝 묻어난다.그리고는 칼국수 한 그릇을 단숨에 비웠다.이어 자리를 옮겨 대학로 한 학사주점에 자리를 잡았다.

소주에 파전과 조개탕이 안주로 나왔다.앞서 주량을 물으니 "좋아하지만 잘 못해요" 라더니 막상 술을 앞에 두곤 달라졌다.

오히려 소주 한 병이란 기자의 주량을 비웃으며 "두세 병은 마셔야지" 라며 농담을 던졌다.

"멜로 연기는 한 번 안해 보실건가요?" "멜로는 별 관심이 없어요. 특히 멜로를 위한 멜로는요. 저는 삶을 진지하게 얘기하는 게 정말 멜로라고 생각하죠. "

술자리는 그로 인해 즐거웠다.혼자 있으면 말이 없고 내성적이라지만 술자리에선 마치 영화에서처럼 기발한 재기를 보여줬다.

밤은 깊어갔고 꽤 술잔이 돌았다.그는 취중에 무게를 두고 이런 말을 했다."연기 1~2년 할 거 아니잖아요. 길게 보고 연기하려구요. 그리고 언제나 주연보다는 주역이 되는 거, 그런 마음 평생 갖고 살아야죠. " 자리를 파하고 술기운이 오른 그를 먼저 보냈다.

마침 부슬부슬 가을비가 내렸다.그의 뒷모습이 가끔 흔들리기도 하고 무거워 보이기도 했다.그러나 연극판에서부터 'JSA' 까지, 긴 시간은 아니지만 그의 변화는 괄목상대할만하다.이제 더 이상 조연 배우 송강호가 아니다.그의 어깨가 우리 영화를 잘 떠받쳐 주길 기대한다.

신용호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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