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만델라의 미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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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남아프리카의 넬슨 만델라. 그는 넉넉한 미소가 일품이다. 27년간의 감옥생활을 겪고도 어쩜 저리도 구김살 없는 표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불가사의하다. 그의 미소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나라 국민들은 마음이 평화스러워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혹독한 인종차별의 백인통치시대가 막을 내리며 첫 민선 흑인 대통령에 당선된 그는 재직하는 동안 흑백간 화해와 공존에 전력을 기울였다.

백인들의 무자비한 탄압에서 벗어나 마침내 흑인들의 세상을 되찾았지만 만델라는 취임 첫성으로 백인들에 대한 보복 중지를 선언했다. 그리곤 오히려 백인들의 기득권을 상당수 인정하는 조치를 취해나가며 점진적 개혁을 펼쳐나갔다.

흑백 양진영에서 똑같이 극단주의자들의 반발이 뒤따랐으나 그가 풀풀 풍겨대는 환한 미소는 그걸 삼켜버렸다. 물론 아직도 남아공은 부유한 백인과 가난한 흑인간 사회적 갈등 때문에 삐걱거린다.

그러나 최소한 예전의 총성이 사라진지는 오래다. 만델라의 화해정책이 서서히 뿌리를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는 지금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갔지만 피부색깔을 떠나 그 나라 국민들은 그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

인종 대결에 비하면 요즘 우리의 여야가 다투고 있는 현안들은 그야말로 지엽(枝葉)이다. 그런데도 뭐하나 매끄럽게 해결하지 못한 채 가파른 대결만 되풀이 하고 있다.

조그마한 문제들에 매달려 끊임없이 티격태격하는 좁쌀정치가 한심스럽고 그래서 새삼 만델라의 넉넉한 웃음이 부러워진다.

싱가포르의 리콴유(李光耀)전 총리는 최근 자신의 두번째 회고록에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을 "위기를 겪는 과정에서 그늘이 진 사람" 이라고 평했다.

웃음이 왠지 자연스럽지 못한, 그래서 다소 어둡게 느껴지는 분위기를 '그늘' 이라고 표현한 듯 싶다.

사선을 수차례 넘기고, 감옥과 망명.연금 등 숱한 탄압을 겪어야 했던 金대통령의 인생역정.정치역정을 돌이켜보면 그러한 그늘이 십분 이해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만델라의 구김없는 모습과 자꾸 비교를 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리콴유는 金대통령이 "이따금 웃음을 지을 때를 제외하고는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고 덧붙였다.

엄격하게 비치는 외모는 이회창(李會昌)총재도 마찬가지다. 정부를 몰아붙일 때 그에게선 찬바람이 인다.

우등생으로 일관하고 오랜 법관생활을 하면서 몸에 밴 철저한 자기관리가 엄격함으로 나타난 게 아닌가 짐작해 본다.

저서 '아름다운 원칙' 에서 그는 중앙선거관리위원장직을 사퇴할 때의 일화를 소개하며 "사마귀가 수레를 보고 달려드는 것은 꼭 승산이 있어서가 아니라 현실에 굴복할 수 없는 본질적 근성때문" 이라고 적고 있다. 일종의 독기같은 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金대통령과 李총재는 이처럼 따뜻함보다는 엄격한 풍모의 소유자라는 점에서 같다. 일반인이 쉽게 범접하기 어렵다.

자기관리가 철저하고 논리적이고 완벽주의자라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다. 자신의 실수를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으며, 쓴소리를 잘 소화해내지 못한다는 소리가 두사람 주위에서 똑같이 들려온다.

완벽주의자인 두 정치 지도자가 궁합까지 맞지 않으니 마찰이 불가피하다. 궁합은커녕 불신의 골이 깊다. 상생(相生)이 잘될 리 없다.

李총재는 "상생의 정치 뒤끝에는 모멸과 배신만 되돌아 온다" 고 金대통령을 원망하고, 金대통령은 "두사람이 합의했는데(약사법 개정의 경우) 다른 소리를 한다" 고 李총재를 탓한다.

윗사람들의 어긋난 감정은 아랫사람들에게 그대로 전이돼 살벌한 대결로 번지는 중이다 '주고 받는 말본새가 거칠기 짝이 없다.

한쪽에선 정권퇴진운동 운운하는 소리가 들리고 다른 쪽에선 사퇴하라고 윽박지른다. 양쪽 집안 싸움은 지역감정까지 얹혀지며 매우 심각한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완벽주의자 두사람의 '그늘' 과 '독기' 가 충돌하며 빚어내는 파열음. 이게 소음으로 가득한 작금의 우리 정치다. 두 지도자의 모습에서 그늘과 독기가 가셔지지 않는 한 어쩌면 정국은 계속 시끄러울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사람의 얼굴엔 개개인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진다고 한다. 만델라의 넉넉한 웃음 역시 마음이 넉넉하기에 가능하리라. 자신을 탄압한 상대를 끌어안는 화해의 정신이자, 마음 비워 허허로운 마음이 고스란히 얼굴 표정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믿는다. '그늘' 없는 만델라의 환하고 푸근한 미소, 그걸 우리의 정치 지도자들에게서도 만나고 싶다.

허남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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