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총련 교육계 대부 노은현씨 51년만에 고향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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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렇게 만나다니 이게 꿈이냐 생시냐... "

"형님, 잘 오셨어요. 어머니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

독립운동을 하다 고문을 당한 아버지의 치료차 일본으로 건너간 형은 21일 51년 만에 고국땅을 밟았다.

6.25가 가져온 동족상잔의 비극은 조총련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독립운동가와 후손의 귀향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 盧차갑씨는 1967년 일본에서 작고했다.

형 盧은현(72)씨는 이날 낮 12시쯤 김포공항 입국장에서 동생 화현(68)씨를 만나자 눈물부터 왈칵 쏟았다.

동생 화현씨는 "형 오신다는 소식에 어머니가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몰라요. '내가 오래 산 보람이 있다' 며 연신 눈물을 흘리셨어요" 라며 소식을 전했다.

동생은 "어머니는 동네 경로당에 다니실 정도로 건강하다" 는 말도 잊지 않았다.

같은 시각 대구에서는 어머니 성란기(96)씨와 동생 순자(65)씨가 은현씨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은현씨는 23일 대구로 내려가 어머니를 뵙게 된다.

대구사범을 졸업한 형 은현씨는 일본 가나가와현 민족학교 교장을 20여년간 지내는 등 조총련 교육계의 대부로 통하는 인물. 현재 재일 한국인 노인운동단체인 고려장수회 회장으로 있다.

서로 전화조차 못하던 이들이 그나마 연락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1995년 아버지 盧차갑씨가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게 되면서부터. ' 일제시대 대구에서 신간회 활동과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며 독립운동에 애쓴 공로가 사망한 뒤 28년 만에 빛을 본 것이다.

동생 화현씨는 "조총련계 형이 있다는 이유로 당한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인편(人便)을 통해 형의 소식을 들었지만 감시가 심해 연락도 할 수 없었다" 고 말했다.

동생의 휴대폰으로 어머니께 전화를 건 은현씨는 "어머니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불효자 은현이가 내일 내려가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이날 오후 5시 서울 워커힐 호텔에서 공식 상봉을 가진 형제는 두 손을 꼭 잡고 다시 한번 눈물을 쏟았다.

기선민.우상균 기자

사진=김진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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