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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 헤치며 고향으로 … 지진보다 강한 가족 사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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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호 04면

15일 오후 아이티로 넘어가는 히마니에서 한 청년이 보안요원에게 통행증을 보여주고 있다. 히마니(도미니카)=정경민 특파원

● 14일 낮
14일 낮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의 타바에 있는 한국 선교기관 아이티미션 관리인 에티엥 커니잔은 두 눈을 의심했다. 수십㎞ 떨어진 고향 베네에 살던 친척 4명이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그것도 이틀 반나절을 걸어서 왔다고 했다. 지진으로 도로가 끊겨 차 없이 두 발로 걸어온 것이다.

정경민 특파원, 아이티 지진 참사 현장서 제 1신

더욱이 12일 지진으로 고향이 쑥대밭으로 변하면서 친인척 25명이 희생됐다는 비보도 날아들었다. 아무것도 남은 게 없었다. 여진의 공포에다 전염병 창궐 우려에 친척들은 고심 끝에 고향을 뜨기로 했다. 커니잔 가족의 생사도 불투명했다.

슬픔에 젖기도 전에 이번엔 델마에 있는 처가 친척 6명이 찾아왔다. 델마에서도 10명의 친척이 지진으로 목숨을 잃었다. 길거리에서만 3만여 구의 시체가 발견됐다고 했다. 건물더미에 깔린 시체까지 포함하면 희생자가 얼마나 될까. 가늠할 수도 없었다.
포르토프랭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 외곽은 큰 타격을 받지 않았지만 대통령궁과 시내 중심가는 베네보다 피해가 더 컸다. 다만 그가 관리인으로 있는 한국 선교단체엔 그나마 펌프를 이용해 지하수를 퍼 올리기 때문에 식수는 구할 수 있었다. 선교단체 건물로 온 친척들은 도착한 날부터 이틀 동안 건물 밖에서 잠을 잤다. 첫날 새벽에 두 차례 여진이 발생해 공포에 떨었기 때문이다. 선교회 건물은 이번 지진에도 벽에 금이 간 정도에 그칠 만큼 튼튼했지만 죽음의 공포를 경험한 이들은 믿지 못했다.

선교회 건물 밖에서도 동네 주민들이 침구를 들고 나와 노숙을 하고 있다. 이미 기울거나 금이 심하게 간 건물들은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커니잔은 “지진을 겪고 난 두 딸은 지금도 차 소리만 나면 소스라치게 놀라 운다”며 “지진의 공포는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른다”고 말했다.

● 15일 오전
미국 뉴햄프셔주 병원에서 간호조무사로 일하는 조셉 나디아(34·여사진). 그는 15일 오전 10시 도미니카 산토도밍고에서 아이티 포르토프랭스로 가는 고속버스를 탔다. 지진으로 끊긴 도로가 복구되면서 두 대의 고속버스가 하루 두 번 운행됐기 때문이다. 식량과 물이 부족하다는 소식에 그는 가진 돈을 몽땅 털어 물과 식량을 샀다.

한데 고속버스가 달리던 도중에 펑크가 나 멈춰 섰다. 언제 차가 올지 기약할 수 없었다. 그는 음식과 물을 모두 버스에 남겨둔 채 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걷기 시작했다. 집까지는 150㎞. 기약 없이 걸었다. 한참을 가던 그는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멈춰선 지프에 고향 친구가 타고 있었다. 도미니카 주재 아이티 대사관에서 일하는 친구였다. 그는 가족의 생사를 알기 위해 한국 선교단체와 함께 고향에 가는 길이었다.

나디아는 이틀 전인 13일 오후 7시 보스턴에서 뉴욕행 비행기를 탔다. 포르토프랭스로 가는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서였다. 아이티엔 네 살배기 외동딸이 친정아버지와 함께 있었다. 아이티계 미국시민권자인 그는 남편과 갈라선 뒤 아이를 혼자 키울 수 없어 친정집에 아기를 맡겨왔다. 지난해 말 생후 처음 아기와 꿈같은 휴가를 보낸 뒤였는데 지진이 발생했다. 친정아버지는 물론 누구와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갔다.

한시도 미국에 더 머물 수 없었다. 그는 13일 오후 8시 뉴욕공항 대합실에 도착해 이튿날 오전 9시에야 포르토프랭스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러나 공항 상공을 맴돌던 비행기는 방향을 바꿔 산토도밍고 공항에 착륙했다. 황당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다시 산토도밍고에서 하루를 까먹은 그는 15일 오전에야 포르토프랭스로 가는 고속버스를 탔다.

친구 덕에 지프를 얻어 탄 그는 다시 고향으로 향했다. 포르토프랭스에서 멀지 않은 비상트네즈다. 사흘째 먹지도 자지도 못했지만 눈을 붙일 수 없었다. 그렇게 달리기를 30여 분. 우연히 동행한 사람의 휴대전화를 빌려 뉴햄프셔에 있는 친구에게 ‘포르토프랭스로 가고 있노라’고 전화를 했다가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가족이 모두 무사하다’는 연락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러나 환희도 잠시, 그는 새 고민에 빠졌다. 정신없이 달려오느라 가진 돈을 모두 써버렸다. 수중에 남은 돈은 50달러. 어떻게 미국으로 다시 돌아갈지 막막하다. 그러나 “아기를 만나 볼에 뽀뽀를 해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하다”며 웃음지었다.

● 15일 오후
15일 오후 4시 아이티로 가는 두 개의 도미니카 국경 검문소 중 하나인 히마니. 포르토프랭스 근교에 사는 웨슬리 벨릭스(24·사진)는 이날 새벽 국경을 넘어 도미니카 쪽으로 나왔다. 아이티로 가려는 사람에게 현지 통화를 환전해 주고 수수료를 벌기 위해서였다. 이날 그가 올린 거래는 단 한 건. 하지만 환전 금액이 커 운이 좋은 편이었다.

지진이 나기 전엔 아이티에서 도미니카 국경을 넘자면 비자가 필요했다. 불법 체류자를 막기 위해 도미니카는 비자도 잘 내주지 않았다. 그러나 지진 직후엔 도미니카 국경도시 히마니까지 연료나 생필품을 사러 나오는 사람에겐 임시로 통행을 허가해줬다. 벨릭스도 비자는 없었지만 일거리를 찾으러 매일 도미니카로 나왔다.

12일 지진이 일어났을 때 그는 동네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고졸이었지만 독학으로 영어와 프랑스어를 공부했다. 언젠가 미국이나 유럽으로 건너가 의사가 되는 꿈을 꿨다. 또래들이 여자친구와 어울릴 때도 그는 독하게 영어 단어를 외웠다. 그러나 지진이 한순간 모든 걸 앗아갔다. 학교가 폭삭 주저앉았다. 집도 무너지는 바람에 부모와 여섯 명의 동생은 거리로 내몰렸다. 당장 먹을 것도 없는 마당에 의사 꿈은 사치였다.

그는 동생들을 더 걱정했다. “대학생인 셋째는 우리 가족의 희망이었다. 대학을 졸업하면 외국으로 건너가려 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오늘 일을 끝내면 이웃집 장례식에 가야 한다. 내일도 가까이 살던 사촌 두 명의 장례식에 가봐야 한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현재 그가 살던 동네엔 식수가 없어 개울물을 떠다 마신다. 먹을 것도 구할 길이 없다. 그는 “구호물품은 아직 구경도 못했다”며 “구호물품을 실은 차는 계속 아이티로 들어가는데 우리에겐 왜 구호물품이 지급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외부에서 아이티 치안을 우려하고 있다는 말에 “사람들이 큰 충격을 받았을 뿐 이성을 잃은 건 아니다”고 말했다.

지진 현장의 김현철 전 삼미 회장
“남을 돕고 사는 게 기업할 때보다 훨씬 재미있다.”
한때 한국의 대기업으로 꼽혔던 삼미그룹 김현철(사진) 전 회장이 선교사 신분으로 아이티를 찾았다. 그는 2004년 도미니카에 월드그레이스미션이라는 선교단체를 세운 뒤 6년째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이젠 회장보다 선교사라는 호칭에 익숙하다.

그는 선교단체 구호단을 인솔해 15일 아이티로 왔다. 한국 봉사단체로는 처음이다. 지진 직후 아이티 구호활동을 검토해 온 그는 뜻밖에 한국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한국기독교연합이 구호물자를 보내려 하는데 길 안내를 맡아달라는 요청이었다. 마침 아이티로 활동 범위를 넓히려던 터여서 선뜻 응했다.

그가 도미니카에 온 건 2000년이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 취임 후 대기업 총수에 대한 사정 바람이 불면서 그는 수차례 검찰에 불려다녔다. 그러면서 “이렇게 살아 뭣하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29세에 그룹 총수에 올라 15년 가까이 경영을 해봐 미련도 없었다. 95년 동생에게 그룹을 맡기고 그는 홀연히 캐나다로 떠났다. 이후 영주권을 기다리다 삼미그룹 부도 사태를 맞았다.

그러다 도미니카를 만났다. 막 정을 붙일 무렵인 2002년 직장암 판정을 받아 두 차례 대수술을 했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던 그는 신에게 의지했다. 재활 후 하와이에서 선교사 훈련을 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2004년 도미니카로 돌아왔다. 재산을 털어 선교회를 설립했다. 월드그레이스미션은 현재 도미니카에서 가장 큰 선교단체다.

그는 지진구호 활동을 이끌고 있다. “남을 돕고 사는 삶이 이렇게 행복한 줄 미처 몰랐다. 지진 상황을 점검한 뒤 본격적인 활동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기독교연합봉사단은 의약품 3만 달러, 식료품 2만 달러어치를 기증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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